질문을 하라는데 질문을 하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압박에 눌려 3평도 채 안되어 보이는 공간에서 질식사 할 것 같았다. 인간이란
목소리만으로도 다양한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 날, 그 목소리에는 사람에
대한 존중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고 종속 관계를 공고히 하려는 날이 선, 서늘한 기운만이 감돌았다. 소리에 무방비로 찔린 나의 자존감은 피를 철철 흘리고 있었다. 비로소
내가 ‘종’이었음을 실감한 순간이었다. ‘종’은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그 찰나의 순간에 말하는 법을 잃고 울고 있었다. 그리고 종의 머릿속엔 종이 울렸다.
‘This is the beginning of the end of this
abusive relationship.’
구두상 오후 7시 30분까지 근무였던
나는 주종관계의 ‘주’가 되고 싶었던 S가 굳이 왜 7시에 저녁밥을 먹고 가라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 날 배달된 음식을 억지로 우겨 넣으면서 종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선의’를 베푸는 행위가 S에게 있어서는 자신을 높이는 데 그 목적이 있었음을
깨달았다. 뜨거운 돌솥비빔밥에 고추장을 넣지 않고 몇 숟갈로 단박에 해치웠다. 음식을 거부한다는 것은 S에겐 반항을 뜻할 것이다. 그러나 당장 분노를 표현할 만큼 어리진 않다. 다만 먹으면서도 환멸감에
허기가 졌다.
1년 전 리스닝(Listening)
수업으로 가르쳤다가 다시 만나 내 수업에 적응해가고 있던 Y나 S같은 훌륭한 학생들과 더불어 다시 티칭(Teaching)의 즐거움을
가져다 준 아이들에 대한 나의 노력과 열정은, 6학년 여학생 G의
술수로 무참히 짓밟혔다. G가 3월에 학생 한 명을 더 데려온다
했는데 ‘나 때문에’ 그 반이 공중분해 되게 생겼다고 S는 분개했다. 반 하나가 통째로 없어지는 것은 S에게 머릿수 당 수익이 날라감을 뜻하니 원장으로서 일개 강사에게 윽박지르는 일은 당연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S가 내게 다시 학원에 와 달라며 제안을 했을 때, 내년에 곧 중학생이 될 G반 아이들의 해이함을 잡아달라고 했었다. 나는 수업에 충실했고, 아이들이 학습을 제대로 끝낼 때까지 퇴근
시간을 넘기면서까지 남아서 봐줬지만, 자신의 뜻대로 수업을 좌지우지하고 싶어했던 G는 학원에 다시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수업에 빠지는 일이 잦아졌고, 급기야는 S에게 선생님을 바꿔달라고 요구했다. 저번주 금요일, 그러니까 2월 7일, G반의 수업을 들어가려는데 원장은 내게 잠시 할 말이 있다며 붙잡았고, 강사
교체 요구가 있었다는 사실을 전했다. 그 말을 전달받고 수업에 들어가 ‘강사 교체’를 요구한 G의
얼굴을 보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수업을 해야만 했다. 교활한 G는
뻔뻔스럽게 그 어느 때 보다 수업에 적극적으로 임했고, 나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반면 G와 친한 6학년 N은, 내가 알던 N의
평소 태도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책을 놓고 온 것부터 시작해서 나에게 불만이 있는 듯한 행동으로 일관했다.
그 날 N은 적어도 내 수업 시간에 엉망진창이었고, 처음으로
내가 학생으로서 아꼈던 N에게 모질게 대했다. 내 화를 그렇게
표출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N이 G와 함께 강사 교체를
요구’한 원장의 말 때문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나는 N을 따로 불러 물었다.
“너 혹시 선생님 바꿔달라고 요구했니? 정말? 네가? 혹시 나한테
불만이 있었니? 내가 널 남겨서? 말해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N은 숨을 헐떡이며 울기 시작했다. 아이는 자신은 그런 말 한 적이 없었고, 오늘 몸이 아파서 수업
태도가 안 좋았다고 했다. 나의 직설적인 물음이 N에겐 감당할
수 없는 상처가 되어 울음은 그칠 줄 몰랐다. 나의 오해였다고 치부하며 N에게 사과했지만 눈물은 그칠 줄 몰랐다. 나도 N처럼 모든 말이 더 아프게 들리는 ‘사춘기’라는 시절이 있었고, N은 이제 막 그 시기에 들어선 듯 했다. 아이를 겨우 달래 보내고, 내 자리로 돌아가 멍해진 상태에서 근무
일지를 쓰면서, 왠지 N을 다시 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마치 N의 감성이 그 어느 때보다 예민한 것처럼, 그래도 그녀보다 더 오랜 시간을 살아본 어른으로서 가질 수 있는 직감이었다.
S는 나를 학원에 다시 데려오려 할 때, N이 내가 다시 왔으면 좋겠다는 말을 참 많이
했었고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한다.
“선생님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그
학교 시험(번역대학원 준비로 학원을 그만뒀었다) 떨어지시고
다시 우리 학원으로 오셨으면 좋겠어요.”
N이 누구보다 영어를 좋아하고 가능성이 많다는 걸 아는 나로써는 S에게 받은 말의 수모보다, 학원을 내 발로 나와야만 하는 불가피한
상황보다 N을 포함, 5학년인 Y와 S를 이젠 더 이상 가르칠 수 없다는 사실에 큰 허탈감과 동시에
분노를 느꼈다. 분노의 대상은 당연히 S였다. S가 한 모든 말이 사실일까? 물론 선생님을 바꿔달라고 한 적이
없다는 N과, N도 그 요구에 동참했다는 S 둘 중 한 사람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 또한 내가 2018년 그 곳에 근무할 당시 친하게 지내는 J 선생님을 소개시켜 J가 일을 했을 때 일어났던 비슷한 상황이 마치 데자뷰(Deja-vu)처럼
일어나는 것이 우연은 아닐 것이다. 나와 J는 동료로써 오랜
시간을 함께했고, 난 J가 가진 영어강사로의 탁월한 능력을
알고 있기에 학원을 키우고 싶어했던 S에게 J를 소개했다. J 역시 나처럼 학생의 실력 향상에 관심이 많았고, 수업의 분위기를
풀어줄 유머 감각이 타고난 사람이었다. 다만 J의 직설 화법으로
‘J 선생님이 무섭다’라는 일부 학생도 있었지만, 적어도 내 눈에 아이들은 J를 잘 따랐다. S는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J를 싫어했다. J에 대한 악감정은, S가 ‘자체
조사’ 했다는 J에 대한 학생 컴플레인(Complaint)으로 이어졌고, 내가 2월 10일 회의 때 보았던 S의
도를 넘어서는 무례함은 사실 J와 내가 일했을 그 때 이미 경험한 바 있다. J는 실제로 본인이 당시 가르쳤던 학생들에게 자신이 무섭냐고, 혹시
내가 너희들을 힘들게 한 게 있냐고 물어봤지만 아이들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한다. 당시 나는 S와 J의 중간에서 J가 S에게 하는 험담을 또는 그 반대의 것을 묵묵히 듣던 입장이었는데, S는
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었다.
“선생님, 아이들은 원래
감정을 잘 숨겨요. 하지만 저한테는 모든 걸 말해요.”
그러니까 S가 가진 유일한 힘은 ‘아이들이
자신을 믿고, 자신의 말 그대로 행하는’데 있었다. 만일 자신보다 더 뛰어난 능력의 강사가 아이들의 마음을 얻으면 그걸 못 참았던 것이고, 자신의 프레임 안에서, 본인의 말을 그대로 이행할 고분고분한 ‘을’이 필요했던 것이다. S의
말에 따르면 수업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이들을 어떻게 ‘구슬리느냐’ 였다. S는 아이든 어른이든 본인이 지는 상황을 죽었다 깨어나도 못 보기에, 특유의
카리스마로 아이들을 자신의 통제권 안에 두는 능력을 지녔다. S 스스로도 ‘본인은 수업을 잘 한다고 할 순 없지만, 아이들을 잡는 능력은 자부한다’고 했었다. S는 자신의 수업을 단 한 번도 공개한 적이 없어 참관할
수도 없었다. 늘 ‘을’의
수업을 참관만 했지, 자신의 그 ‘탁월한’ 능력을 직접 보여준 적은 없다. 현재 일하고 있는, 이 곳이 첫 경력인 G 강사의 수업이 못미덥다며, 학부모의 컴플레인이 자주 들어온다며 나에게 얘기하곤 했지만, G에게
자신이 자랑하는 확인 불가한 ‘Know-How’를 가르쳐주진 않았다.
한편 나는 교실이 답답해서 문을 자주 열어놓고 수업을 했다. 잠깐 들르던 학부모든, 다음 시간의 학생이든, 수업 스킬이 필요했던 G든 누구나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나 이 정도 하는데 꼭 참관을
해야 알아?’ 라는 일종의 암묵적, 저항적 행위였다. 누구보다 매 순간 열심히, 최선을 다해 수업다운 수업을 하고자 가르쳤기
때문에 거리낄게 없었다.
지금은 그만 둔 J 강사가 1년 반
전 경험한 공포스런 회의는 2월 10일에 재연되었다. 그 날 N 반 아이들은 총 네 명에서 한 명만이 참석했고, 그 한 명은 또랑또랑한 눈빛으로 수업에 임했다. 과반수가 결석했다는
걸 빼면 순조로운 마지막 수업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마지막 수업이었다. 수업을 마치고 바로 회의에 들어갔다. S는 학원 업무 리스트를 내밀며
읽어보고 궁금한 게 있으면 질문하라 했다. 내가 질문을 꺼내자마자 내가 수업 시간을 지키지 않은 것을
트집 잡아 전초전을 열었다. 수업 시간이 조금씩 늦게 끝나는 게 나의 유일한 문제였고, 나 역시 그것만 고치면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알기에 개선하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2018년 일했을 당시 나는 거의 리스닝(Listening)을 맡았고, 그 파트는 유일하게 S가 가르치지 않은 과목이라 본의 아니게 수업
자율권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학습 목표와 테마(Theme)에
따라 리스닝이지만 회화를 접목하는 등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었고, 그 당시 가르치는 즐거움을 크게
느꼈다. 그러나 다시 수업을 하게 되면서 S가 가르쳤던 리딩(Reading)을 맡게 되면서 숙제 채점을 시작으로 단어 시험 및 핸드아웃(Handouts)
등 40분 안에 많은 것을 소화해야만 했던 터라 제대로 된 수업은 거의 포기해야만 했고, 핸드아웃을 줄이거나 진도에 여유를 주는 등의 아이디어를 냈지만 거절당했다.
S는 ‘수업을 제 시간에 끝내는 것도 강사의 역량이다’,
‘핸드아웃 같은 확인 작업이 없으면 이 동네 엄마들은 싫어한다.’ 등의 주장을 펼쳤다. S에게 있어 강사의 역량은 제 시간에 끝내면서 뭔가 했다는 걸 보여주면 되는 ‘보여주기식’ 수업을 군말 없이 하면 되는 것이었다. 사실 수업을 늦게 끝내는 것에 대한 S의 불만은, N의 반이 깨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나에 대한 분노로 탈바꿈하기 전의 예열 같은 것이었다. S는 자신이 어렵게 일궈낸 성과, 즉 학생 유치가 나로 인해 산산조각이
나게 생겼다고 내게 책임 전가를 했다. 누구보다 책임감을 지니고 수업에 임했고 에너지를 쏟아 부은 한
사람에게 협박하고 윽박질렀다. 말들의 행간에는 오로지 자신이 이기고자 하는 헛된 승부욕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기고자 덤비는 자에게 대항해봤자 물릴게 뻔했다.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묵묵히 그 참혹한 시간을 견뎌내는 일이었다. S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추악했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흡연을 해 온 S의 얼굴을 담배 연기로 뿌옇게
해 가리고 싶었다. 학원 행정 5년, 강사 경력 6년의 커리어가 모조리 부정 당하는 순간이었고, 자존감은 수직 하강했다. 끝끝내 참았던 눈물이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터졌다. 그 날이 나와 학원이라는, 나를 강사로 살게
해 준 특수한 실체와의 안녕을 고하는 계기라고 생각한다. 삶의 전환점일지도 모르겠다.
이로써 S와의 특이한 인연도 막을 내렸다. 사실
내 첫 학원 경력은 종로 2가 탑골 공원 바로 맞은 편에 있는 ybm이었다. 당시 내 나이는 21살이었고,
ybm의 자체 강사 리크루팅(Recruiting) 부서의 어시스턴트(Assistant)로 일했다. 그 때 S는 프론트 데스크 직원이었다. 언니 – Joey(내 영어 이름) 하고 부르던 사이였다. 내가 그만둔 날, 데스크 언니들은 인사동 전통 주점에 데려가 술을
사줬고, 그간 내게 차마 말하지 못한 학원에서의 고달픈 삶을 봇물처럼 터뜨렸다. 그 때 S는 담배를 꺼내 태웠다.
항상 조용하게만 보였던 S가 담배를 피는 모습을 처음으로 보고 놀랐다. 담배가 타 들어갈 때마다 S의 태도는 장악력을 지니기 시작했다. “너도 한대 펴볼래?” 난 필 줄 모른다고 거절했다. 그게 S를 본 마지막이었고, 18년
후 학원 이력서를 넣은 이 곳에서 연락을 준 사람이 바로 S였다. 통화를
했을 당시 우연의 일치이기엔 너무 기묘한 인연에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아는 사람의 ‘을’로 있고 싶진 않았고 지원을 철회했다. 그럼에도 S는 한 번 얼굴이나 보자고 설득했고, 나는 2017년 12월의
어느 날엔가 돈을 상징하는 조그만 화분을 사갔다. S와 나는 그렇게 만났고 마음이 맞았으며 일을 시작했다. 그 당시에 S를 도와주던 M 선생님이
있었는데, S는 나에게 그렇게 M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M에 대한 수업 컴플레인이 많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리고 두 달 뒤 M 선생님을 내보냈다. M 선생님은 학원 오픈 기념으로 S에게 화분을 몇 개 사갔는데, 그 화분들은 오래 살아남지 못했다. S는 그 화분들과 나의 화분을 비교하며, 내가 사 온 화분은 물을
잘 안 주는데도 더 잘 자란다며, 내가 있으니 학원이 살아난다고 했다.
또한 S는 나와 ybm에서의 마지막 날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노라며 보여주기도 했다.
S에 대한 좋은 기억도 있지만, 그녀는
애초에 사람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 S를 만족시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S와 함께 있으려면 S는 갑이 되어야만 했고, 상대방은 을이여야만 한다. 나는 늘 지나간 강사들을 욕하는 S를 이해해줘야만 했고, 내가 데려온 J 역시 그 대상 중 하나였다. 이사나 불가피한 사정 외의 선택에
의해 퇴원한 학생들도 그녀에겐 비난의 대상이었다. 그렇게 퇴원한 아이들 역시 예의를 지키지 않아 무언가 S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을지도 모르지만, 퇴원의 원인은 늘 학생의
개인적 문제였다. 학원이 교육적으로 학생을 만족시키지 못한 부분에 대해선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S의 교육 방침에서 배울 점도 있긴 하다. S는 자기 주도 학습을 실현시키려 하고, 자신은 그것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질적인 영어 학습에는 관심이 없었다. 솔직히 그녀는 ‘영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어쩌다 영어 학원에서 경력이 많아지다 보니 할 수 있는 일은 ‘원장’이었다.
S는 자신만의 확고한 믿음을, 마치
성경(Bible)처럼 확고하게 말하는 능력이 좋다. 설령
그 믿음이 잘못되어도 말이다. 언젠가 자신이 4대 보험을
불신하는 이유를 강하게 어필했고, 내게 다시 일하자며 제안할 때 내가 ‘4대 보험’을 꺼내자 그건 절대 안 된다고 했다. 파트지만 경력 강사로서, 4대 보험이 되지 않는 사업장에서 최소한의
인간적인 대우를 바라고 제시하려던 페이(Pay) 액수를 두고 ‘내가
그 가격을 부를까봐 조마조마 했다’ 하면서 인센티브 제도를 운운하며 그렇게 하면 내가 원하는 급여를
받을 수 있다고 설득했다. 당연히 고용주 입장만 좋은 그 체계에 넘어가지 않았던 나는, 그저 다시 가르칠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남편이 4대 보험으로 피부양자로 되어 있는 내게, 세무사와 협의할 테니 그대로
유지하라고 했다. 학원의 MS-OFFICE는 정품이 아니라서
매번 로딩을 기다려야만 했다. 법망의 테두리 안에서 교묘하게 ‘을’을 이용했다. 교육자가 아니라 개인 사업자였으니까.
선생과 학생간의 이간질 그리고 선생과 선생간의 이간질로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해오던 S에게, 교육이 아니라 학생 상대의 거짓 장사를 하는 S에게 나의 존엄과
가치를 잃어버린 그 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고, 나를 지키기
위해서 내 평생 처음으로 수업에 가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다. 월수금 출근이라 화요일 수업이 없던 터라,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학원 문을 열고 그 곳에 두었던 몇 가지 짐들을 가지고 나왔다. 그리고 그 건물 1층의 단골 카페에 들렀다. 내가 떠나는 마침 사장님이 청소 중이라 마지막 인사 겸 커피를 마시러 갔는데 사장님이 무슨 일 있었냐고 묻자
터질게 터져버렸다. 자세한 얘기는 못했지만 나의 자존감이 무너져 더 이상 가르치지 못하겠다는 내가 아이들을
걱정하자 사장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기가 왜 그걸 신경 써? 그건
원장의 몫이지. 오너(Owner)가 리드를 못해서 생긴 일이야. 이미 자기 손을 떠났다고. 지금 할 일은 자기 마음 잘 추스리는
거야.”
카페 사장님에게 기대하지 않은 위안과 조언은 마음을 회복할 수 있는 큰 역할을 했다. 카페를
나와 길을 건너 다시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면서 함께 일한 동료 G 선생님과 통화로 마지막 인사를 건넸고, S에게 다음과 같이 문자 통보를 했다.
‘원장님,
직접 뵙고 말씀을 드리는 게 예의인데 제 감정을 추스려야 하는 상황이라
부득이하게 문자로 말씀드림을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어제 회의를 마치고 종일 눈물이 그치질 않았고 잠을 못 이뤘습니다. 학생들과
학원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후임자를 구하실 때까지 일을 하느냐 아니면 떠나느냐를 두고 장고 끝에 후자를 택하기로 했습니다. 이유는, J, N 그리고 G가
제가 학원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학원에 오지 않는 상황이 이어지는 게 학원 그리고 아이들에게 더 피해를 주는 거라 판단했습니다. 아이들에게 정말 미안합니다. 아이들의 학습을 잘 이끌어보겠다는 제
과욕이 너무 앞섰고 아이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아이들에게 제 마음이 전달될진 모르겠으나 진심으로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뿐이고 특히 N에게는 더 그렇습니다. 이제
제가 없는 학원에 아이들이 이젠 마음 놓고 예전처럼 학원에 편히 와서 공부하길 바랍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간 원장님이 일궈 낸 수업들이고 모은 학생들인데 그 어떠한, 추호의 피해를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저 때문에 반이 깨진다는 사실
때문에라도 마음 편하게 일할 수 없습니다.
수업 시간을 끝내 지키지 못한 것도 죄송합니다. 원장님 말씀 계속 기억하며 저번
주 금요일부터는 주어진 시간 내에 진도를 끝내는 것에 안간힘을 썼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끝내야 할
것들이 눈에 보여 1분만, 2분만 하다가 시간을 또 지키지
못한 것 같습니다. 제 역량 부족입니다. 이 역시 할 말이
없고 전적으로 제 능력 부족입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N과의 저번 주 금요일 대화는 가감 없이 말씀 드립니다. 저번 주 월, 수엔 N의
수업태도가 나쁘지 않았지만 금요일엔 많이 좋지 않았습니다. 또한 원장님께서 제가 수업에 들어가기 전
G 뿐 아니라 N 역시 선생님 교체를 원했다는 사실이 매우
뼈아팠습니다. 그럴 아이가 아닌데... 물론 원장님께서 또래
따라가는 나이이니 진심은 아닐 거라 말씀 주셨고요. 제가 일대일 대화에서 직접 물어봤습니다. 선생님 바꿔달라고 했다 들었는데 선생님한테 혹시 기분상한 거 있냐고. 아니면
저번에 오래 남겨서 힘들어서 그런 거냐고. 아이는 갑자기 숨을 헐떡일 정도로 울면서 자기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고, 남겨서 그런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러면 선생님이 오해했나 보다 미안해. 그런데 지금 이렇게 공부하는 건 아니지 않니. 내가 학원에 다시 오기로 마음 먹었을 때 너를 다시 가르칠 수 있다는 사실에 정말 기뻤다. 그런데 지금의 너는 내가 알던 N이 아니다. 너 영어 좋아하고, 잘 하고, 충분히
더 잘 할 수 있어. 내가 도와줄께. 하지만 너의 태도가
바뀌어야 해. 적극적이던 너의 모습으로... 아이가 울음을
멈추지 않았는데 G가 밖에서 계속 기다린다는 말을 듣고 황급히 보냈습니다. 주말 지나고 다시 월요일이 되어 아이 모습 보아하니 결과적으로 제가 아이를 더 힘들게 한 게 되어버렸습니다. 설득이 잘 되지 않은 것이고, 이것 역시 제 한계입니다.
그래도 잠깐이나마 Y, S 등 다시 얼굴 보고 수업할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제가 퀸즈에 다시 오려고 했던 이유 중 가장 컸던 것은 그런 훌륭한 학생들과 수업을 다시 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부족한 제게 그런 기회를 제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또한 원장님께서 저를 최대한 배려하려 노력하셨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이십
대 초반에 언니로 잠깐 스치던 사이라 생각했는데 학원을 통해 다시 인연을 맺고 일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앞으로 저는 제 길을 가겠지만 원장님께서 제게 따뜻하게 해 주신 시간들만큼은 좋은 기억으로 갖고 살아갈 것이고, 마음속으로 잘 되시기를 응원하겠습니다. 또한 G쌤은 비록 저보다 어리셔도 훨씬 의연하시고 더 큰 사람입니다. G쌤
같은 좋은 동료를 만났던 것도 행운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4일치 근무 급여는 안주셔도 됩니다.
받을 수도 없고요. 리딩 단어 외 프린트 물들은 파란색 파일에 레이블 하여 반마다 미리
준비했습니다. 오늘 오전에 학원에 잠깐 들러 제 물건만 챙겼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그 동안 감사했고 건강하세요.’
문자를 보낸 뒤 정확히 5분 뒤에 S가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다. S는 끝까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내가 성급한 결정을 내렸고, 그 날 내가 퇴근 한 뒤 모든 상황이
정리되어 나를 보고 직접 설명하려 했다. 그러니 저녁에라도 꼭 통화했으면 좋겠다.’ 라는 문자를 보냈다. 자신의 잘못을 피해자에게 전가하는 전형적인
가해자의 행동을 취하고 있었다. 더 통화할 이유가 없었고 나는 마지막 문자를 보내고 S의 번호를 차단했다. 이미 그녀에게 받은 정신적 상처가 컸기에 통화를
해서 또 다른 상처를 받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장막을 치는 것은 어쩌면 선택이 아니라, 나를 지키기 위한 필수였다고 생각한다.
‘원장님 무음모드라 전화 받지 못했고, 받는다고 해도 지금은 감정 조절이 안되어 힘들 것 같습니다. 사실
어제 일로 많은 충격을 받았고 자존감은 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강사 일 하면서 그래도 자존감은 지키며
살아왔고 그걸 최우선시 했는데 어제는 그걸 몽땅 잃었습니다. 물론 학원과 아이들을 생각하면 당장의 제
선택이 옳진 않습니다만, 제 자신에겐 맞고 현재로선 그것밖에 없습니다.
제가 많이 부족하다고 느꼈고, 제가 아이들을 힘들게 하는 존재로 있고 싶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게 좋아서 간 거였는데 그게 없다면 제겐 그 곳에서 일하는 게 "무" 입니다. 아이들이
저 없이 마음 편하게 공부하길 바랍니다. 그게 지금은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저녁에 전화를 못 받을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건강하세요.’
4일치 급여를 받지 않은 것은 어리석은 선택이 아니라, 적어도 내가 당신의 주종관계는 아니었음을 증명하는 유일한 방어책이었다. 그
날의 치욕은 돈으로도 환산할 수 없었다. 그리고 수요일, 목요일이
지나고 벌써 금요일이다. 그 일이 생긴지 나흘이 흘렀다. 카페
사장님은 ‘일주일 치 일했으니 딱 일주일 아플 거고, 그
시간이 지나면 다 괜찮아 질 거라고’ 하셨다. 이미 이틀이
지난 수요일에 그렇게 열정적으로 수업하던 Joey가 자취를 감춰 궁금해하는 아이들은 나라는 존재의 부재는
그저 미스터리로 남긴 채 금새 잊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잘 지낼 것이다. S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학부모의 발길은 그래도 꾸준할 것이다. 학원 강사라는 존재는, 그렇게
잊혀지는 존재다. 그래서 잊혀지기로 했다. 그리고 이제 진짜
나의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