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자기소개서 작성 때문에 일부러 자원봉사, 게스트 관련 뱃지들을 스캔했다. 새삼스럽게 올려보는 이유는 이렇게라도 보고 있으면 흐뭇한, 과거 지향적인 나의 게으른 대리만족 때문이다.
영화를 좋아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영화를 사유하고 싶었다. 나만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어쩌면 영화제에 닥치듯 참여했던 것도 나만의 영화가 있을거라는 착각이 있어서였다.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제는, 지금은 사라진 십만원 비디오 페스티벌이다. 거기엔 '내'가 있었고 '우리'가 있었다. 귀차니즘이 있었지만 나름대로 비디오 아트에 대한 소신이 있었고, 가끔 보면 귀엽기까지 했던 최소원 프로그래머(언니로 불렀었다. ㅋ), 전투적으로 글을 썼던 미혜언니는 가끔 최소원과 상극같이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같이 일을 하고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정미 언니. 언니라는 칭호가 정말 안 어울리게 무뚝뚝하고 보이쉬했지만 나는 그녀에게 언니라고 부를 때 웬지 모를 안도감을 느꼈다. 십만원 사람들 중 누가 가장 보고 싶냐고 묻는다면 난 주저없이 정미 언니를 찾을거다.
나보다 영화를 더 좋아하는 사람도 없을 거라는 자만심은 준석 오빠를 만나고 무너졌다. 군대 가기 전에 스태프 일을 했던 그는 내가 아는 사람 중 맹목적으로 영화에 대한 사랑으로 똘똘 뭉쳐있었다. 작가주의 영화가 좋아서도, 액션 영화가 좋아서도 아닌 그냥 영화 그 자체로 좋아했던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다. 그런 열정의 일면이 류승완 감독과 비슷하다고 늘 생각해 왔는데,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충무로 데뷔를 위해 시나리오 작업을 한다는 거였다. 얘기를 듣고 빈 속에 소주 한잔을 벌컥 들이킨 것 처럼 속이 뜨거워져 왔다.
문창과 출신의 서희 언니와 덕주 언니는 판박이였다. 미장원에서 길들여질 수 없을 것 같은 긴 머리와 피어싱이 둘을 도프갱어로 보이게 했다. 성격도 아주 비슷했다 내 기억엔. 직설적이고, 자기애가 강했다. 나는 그런 표현에 매우 서툴렀는지 처음엔 이 둘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다. 그렇지만 순전히 내가 어려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그녀들은 누구보다 날 잘 챙겨주었다. 고마웠다.
한예종에 들어갔다는 문재하 언니도 기억난다. 난 그녀가 좋았다. 몇 번 보지 않아도 다시 보고 싶다는 느낌을 주었다. 그녀 주변엔 항상 좋은 공기가 머물렀다. 옛날 카이 잡지엔 재하 언니와 라디오 레이블의 고기모씨와 내가 찍은 사진이 있다. 얼마전 논문 작업 때문에 자료를 찾다가 고기모씨의 글을 마주하게 되었다. 기분이 묘했다.
무엇보다 이 모든 페스티벌을 겪으면서 알게 된 사람들 중 김영룡이라는 친구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그야말로 살아있는 독립 영화같은 존재였고, 지금도 그러리라 믿는다. 영룡과 나는 포스터를 붙이기 위해 신촌과 이대 그리고 대학로 등지를 돌아다녔다. 땀이 주룩주룩 흘렀지만 친구와 나는 행복했었다. 독립예술제(지금의 프린지)에서 만난 상준 오빠와 티구의 인연은 신기했다. 독립예술제 피날레를 마치고 밤길을 걸어가며 "언젠가 인연이 있으면 보겠죠."라는 말과 함께 헤어지고 정확히 한 달 뒤 십만원에서 만나 얼떨결에 퍼포먼스까지 하게 되었다.
소리마저 잘 들리지 않는 아날로그 8미리 비디오 영화에 자극받고, 신촌 '꽃'에서 항상 모여 맥주를 마시며 영화와 음악 이야기를 했던 시절이 있었다. 개인적인 바램이라면, 십만원 사람들이 다시 모였으면 좋겠다. 그 곳엔 나만의 영화가 있었노라는 고백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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