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 14일 금요일

Original Sound Track [Reality Bites]



내가 90년대 아이인 이유
90년대만큼 무언가 열정이 소생하고 들리고 보이는 모든 것들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던 시절이 없었다. 너바나의 태동을 산산조각 내어버린 커트니 러브가 서서히 무너져가는 변천사의 막바지를 보는 것처럼 술이든, 마약이든 그 어떤 것도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지금 세상에 있어서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지금 내게 있어 90년대는 일종의 구원같이 보인다. 디지털을 받아들이기엔 복잡한 건 딱 질색이었고, 아날로그로 계속 남으려니 소위 신세대들이 들먹이는 쿨(Cool)함에서 벗어나도 뒤떨어진 사람 같아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질풍노도의 시기 속에서 뭉뚱그려진 젊음은 얄팍한 세태를 비집고 주파수를 흔들었다. 쓰리 코드만으로도 감동이 밀쳐오는 Smells Like Teen Spirits 가 그러했고, 해적 라디오의 영웅 DJ인 <볼륨을 높여라>의 하드 해리가 될 대로 되라며 기존 세대에 항거했다. 퍽큐 씨네마의 대표격인 하모니 코린은 있는 그대로의 틴에이지 섹스를 찍으며 “So What?”이라 답한다.
그러나 적어도 이들의 지저분함 속에는 곪아버린 냄새를 잊게 하는 힘이 있고, 자유분방한 행동 밑으로는 DIY의 정신이 배어있다. 지저분해서 너무 싫은 것이 아니라, 지저분하니까 사랑하는 것이다. 될 되로 되라(So Be It)를 외치지만 6-70년대 플라워 무브먼트를 주창했던 히피들의 느슨한 타락만큼 공격적이지 못한 개인주의자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개인주의자들의 겁 많은 내면을 사랑한다. BMW를 사달라고 졸라대어 결국 얻어내지만 미숙한 운전만큼이나 사회 초년생으로써의 아픔을 겪는 릴레이나(위노나 라이더)와, 어메리칸 드림이 지겹다고 말하지만 그 꿈에 속하지 못하는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이중 고백하는 트로이(에단 호크), 하루에도 몇 번씩 상대를 갈아치우며 자신의 연애록을 만들어가지만 에이즈 양성 테스트 앞에서 몸을 사리는 비키(지앤 가로팔로), 그리고 자신의 성 정체성을 놓고 고민하는 새미(스티브 잰)까지. 그러나 우리는 이 네 명의 젊은 군상들이 직면하는 괴로운 현실(Reality Bites)을 놓고 그들의 번민을 크게 공감해서 이 영화를 찾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 지리멸렬한 현실을 이겨내는 네 명의 자잘한 일상이 실은 우리가 원하는 소우주이기 때문이다. 두 명의 남자, 두 명의 여자. 숫자도 딱 들어맞고 그림도 좋은 비율에서 서로의 영역을 무너뜨리지 않는 이들의 일거수 일투족은 아이러니하게도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야 만다. 졸업식을 마친 어느 날에 학사모를 쓴 채로 술에 절어 내려다보는 뉴욕의 한복판, 그 위에서 기타를 두둥기며 낄낄댄다거나 ‘My Sharona’가 흐르자 아무렇지도 않게 편의점에서 춤을 추고, 그들 네 명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퀴즈를 내고 맞추며 ‘너와 나, 5달러, 그리고 한 잔의 커피, 한 모금의 담배’만 있으면 된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그들만의 리그가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로써 그렇게 부러울 수 없는 것이다.
이 부러움의 후광에는 주인공들의 시대를 아우르는 다양한 문화가 함께한다. 영화 속 내내 보여지는 이들의 생활 패턴에서 자연스럽게 노출되는 모든 것들이 지금에 와서도 그다지 새롭지는 않을 것들인데, 7-80년대의 복고를 바라보는 생경함과는 전혀 다른 추억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가령 클럽에서 연주를 하고 노래를 하는 트로이와 음악을 함께 하는 동료들로 출연한 까메오로는 그 유명한 90년대 그런지의 대표주자였던 펄 잼(Pearl Jam)의 에디 베더와 위노나 라이더의 남자친구로도 잘 알려졌던 소울 어사일럼(Soul Asylum)의 데이브 퍼너가 있다. 릴레이나는 쉴 새 없이 다이어트 코크를 마셔서 중독에 가까울 지경이고, 하루 종일 MTV에 채널을 고정한 채 무료한 일상을 보낸다. 지구를 거꾸로 돌 만큼의 시간에 비비스와 벗헤드가 잠깐 출연하고, 쉴새 없이 얼터너티브 락 밴드들의 뮤직 비디오가 흐르기도 한다.
BMW를 성공적인 사회 생활의 지름길로 여겼던 릴레이나가 새로 뽑은 비머(Beemer; BMW의 속어)를 몰고 Squeeze의 ‘Tempted’가 흐르면서 영화의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 또한 대히트를 했다. 영국 밴드인 World Party의 멤버인기도 한 칼 월링어(Karl Wallinger)의 조율로 90년대의 영미 모던 락 사운드를 한꺼번에 들을 수 있는 이 영화에는 그 유명한 편의점 씬에서 릴레이나와 비키가 머리카락을 흔들며 헤드뱅잉을 할 때 더 낵(The Knack)의 ‘My Sharona’가 흐르면서 70년대 사운드를 재조명했고, 쥴리아나 햇필드(Juliana Hatfield)와 리사 로엡(Lisa Loeb)같은 미국의 여성 싱어 송 라이터들의 인기를 급상승 시켜놓기도 했다. 특히나 극 중 클럽에서 노래를 하는 트로이를 위해 직접 노래를 하기도 한 에단 호크는 리사 로엡의 수록곡인 ‘Stay(I Missed You)’의 뮤직비디오를 연출하기도 했는데, 이 노래는 무려 빌보드 전체 순위에서 무려 12주간 1위에 머물기도 한다. U2의 1988년 발표곡이기도 하면서 다큐멘터리 영화인 에 삽입되기도 한 ‘All I Want is You’는 허공을 맴돌다가 릴레이나의 가슴에 박히기도 하고, 결국 트로이와 릴레이나의 사랑을 확인하면서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엔드 크레딧에 시점에서 빅 마운틴(Big Mountain)의 ‘Baby I Love Your Way’가 흐른다. 피터 프램튼(Peter Frampton)의 곡을 스카 스타일로 리바이벌한 이 노래 역시 빌보드 1위를 장식한 바 있다.
극 중 트로이가 불렀던 ‘I’m Nuthin’’ 이라는 곡에는 이런 가사가 있다.
“미국의 꿈을 얘기하는 사람들에겐 질렸어. 내겐 그런 꿈조차 없지. 너도 보다시피 난 아무것도 아니니까.”
쉰 목소리를 가래 뱉어내듯이 토하는 에단 호크의 목소리를 밤새 트랙킹하며 아무것도 아니라지만, 아무것도 아닌 것을 쿨하게 여겼던 94년의 여름. 내겐 꿈이 있었다. 괴로운 인생(Reality Bites)을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고픈 마음. 그러나 역시 쉽지만은 않았던 사춘기의 계절이 흘렀고, 지금도 가끔은 그 때가 그리워진다. 꿈도 사랑도 아무렇지 않게 다가왔던 90년대가.
안현선
joeygottheblues@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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