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 14일 금요일

일상의 음악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일상을 제거하고 싶은 욕망이다.

그러니까 수많은 일이 산적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Death Cab이 생각나면 여지없이 mp3 서치 엔진을 켜서 그 수많은 Death Cab의 음악들 중 제일 좋아하는 'Soul Meets Body'를 찾아서 들어야만 직성이 풀리곤 한다. 그렇게 하고자 했던 일, 하려던 일을 까먹게 된다.

책 제목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일본 작가가 쓴 생활 지침서-'20대에 하지 않으면 안될...' 뭐 이런 종류 따위다-에서는 실제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제쳐두고 주변의 사물에 눈길을 주면서 멍청해져서 시간을 버린다는 지적을 했다. 나는 대체적으로 주의가 산만한 편이다삶는 달걀 불을 끄러 부엌으로 가는 동선에서 티비를 마주한다거나, 흩어진 신문을 모으는 등 여차여차해서 삶은 달걀이 아닌 '구운 달걀'과 탄 내를 먹게 된다. 한 번은 이런 적도 있었다. 목욕을 하기 위해 물을 받아 놓고 쉐이버를 가지러 방으로 들어가다 그 앞에 놓인 수많은 씨디 들을 훑어보다 문득 조용한 음악이 듣고 싶다는 생각에 빌 에반스의 'Waltz for Debby' 음반을 틀어놓고 화장실에 들어가보니 물이 가득 넘쳐서 악착같은 엄마의 거의 '집착'에 가까운 구박을 들은 적이 있으니. 아랑곳하지 않고 평화롭게 흐르는 에반스의 'Waltz for Debby'는 정말이지 엄마의 잔소리와는 불협화음이었다.

그래도 난 내가 살고 있는 오늘 이 시간, 일분 일초라도 음악이 흘렀으면 좋겠다. 지금 있는 이 건조하디 건조한 사무실에서 이어폰으로 흐르는 닉 고메즈의 'You Feelin' Me'는 나의 몸을 점점 침잠하게 만들어 마치 유체이탈을 경험하는 듯한 신비로운 잔상을 만들어낸다. 팔꿈치 뒷편에 널 부러진 씨디 플레이어에선 새로 산 Spinto Band의 앨범 'Nice and Nicely Done'의 소녀가 자전거에 기댄 채 웃고 있다. 스핀토 밴드는 요 근래 만난 최고의 밴드이다. 내가 이 음악을 들었을 때 기타를 치는 어떤 녀석이 '프랑스 영화의 한 장면 같아요.'라는 말을 했는데, 아마 그 시간 그 때 즈음하여 우리는 빈티지 차림으로 파리(Paris)를 걷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 적어도 나는 음악을 들음으로써 구질구질하다고 느껴왔던 일상을 제거하고 음악이 깔린 인생에서 '구질구질'한 인생의 단면을 아삭아삭 씹어버릴 수 있었다음악은 기억을 담보하지 않는다. 보기 좋게 내가 하려던 일, 그 착잡한 기억을 잊어버리고 잠시 동안 이나마 독한 마약에 취해 쓰러진 '트레인스포팅'의 렌튼처럼, 세상은 나의 Just a 'Perfect Day'가 된다. 루 리드의 그 검은 음성 속으로 나의 눈이 스르르 감긴다.

안현선
jjorang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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