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욕을 하고 나와서 미나는 부엌으로 뛰어갔다. 『배가 고파. 배가 고파.』양파를 썰고 계란을 깨뜨리고 하면서 그녀는 계속 소리쳤다. 미나의 침대에서 오믈렛을 나눠먹고 그들은 한동안 맨해튼의 야경을 바라보았다. 우디 알렌의 영화 포스터처럼 잿빛으로 물든 도시의 밤풍경이, 속에 담은 슬픔을 억제하듯 단조롭게 펼쳐져 있었다. 차도로부터 들려오는 온갖 종류의 소음도-경찰차의 사이렌조차-듀크 엘링턴의 피아노 연주처럼 감미로웠다. 과장이 아니라 정말 음악소리와 비슷하게 들렸다. 그들은 다시 서로의 몸을 조금씩 만지고 쓰다듬고 음미하며 새로 시작했다. 굳이 계단을 오르지 않아도 그들 밑에는 뉴욕이 존재하고 있었다.
-정정희 장편 소설 [오렌지] 중 ‘뉴욕’
아날로그의 질감을 코팅한 세피아 톤 속 도시남녀를 부르다.
펑키 브라운 쇼케이스
04/15/2006, 7PM, 롤링홀
항상 느끼지만 요즘 음악, 특히 요즘 감각이라고 말하는 어번(Urban)의 표현은 늘 한정적이었다. 글을 쓰는 지금도 고민이 되는 것은 마찬가지. 어번뮤직이니 정도의 그루브가 필요함은 영희에게 철수가 있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것이겠고, 그 다음의 표현력에서 벽을 치며 미천한 문장력에 저주를 퍼붓는 것이다. 늘 써먹던 레씨피들-도시, 네온사인, 와인, 립스틱-이 루럴(Rural, Urban의 반대말)하게 펼쳐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연하고 식상한 어번 뮤직의 묘사들을 정공으로 써줘야 정확히 표현되는 음악이 나왔으니 쾌재가 나온다. 아니, 그것을 둘째 치고서라도 어번에 대한 제대로 된 느낌을 이제서야 만난 듯싶다. 들으면 입이 떡 하고 벌어질만한 가수들의 세션을 맡아오며 밴드 ‘시베리안 허스키’에도 있었던 엄주혁, ‘시나위’에서 활동한 바 있는 김경원, 역시나 세션 경력이 만만치 않은 박용석. 이들이 의기투합하여 결성한 [펑키 브라운]이 바로 그 주인공들. 이들의 길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늘 걷던 도시 한복판의 에피소드들이 영화 스틸처럼 현상된다. 막 뽑아내어 윤기가 가득한 인화지의 프레임 속에서 세련된 연주에 취해 몸을 흐느적대는 도시남녀의 새러데이 나잇을 들여다본다.
#1. 함께 하는 거야 – ‘Everyday’
단어를 도시여남으로 바꿔야 할 정도로 장내는 여성들로 들끓고 있었다. 여심을 잡은 펑키 브라운의 음악을 듣고자 구두를 신고 스탠딩 공연을 감내해야 하는 이들이 한 둘이 아니었지만 공연장은 이미 설레임으로 꽉꽉 대기를 메우고 있었다. 특이했던 점은 그 틈에서 친구와 삼삼오오 모여 공연을 보러 온 실용음악과 지망생들. 대부분이 중, 고등학생 정도 되 보이는 이들의 대화가 얼핏 들리면서 귀를 세우게 한다. 연주 얘기를 하다 펑키 브라운의 실력에 대해 손가락을 치켜든다. 뭔가 보증수표처럼 공연의 기대감은 배가 된다.
본격적인 공연이 시작되기 전에 항상 에피타이저처럼 등장하는 게스트의 공연으로 조명이 밝아졌다. 언뜻 들었을 때 SG 워너비의 음악을 떠올리게 하지만, 그에 못지 않은 가창력으로 관객의 숨을 죽인 3인조 여성 트리오 ‘씨야’의 무대에 이어 박혜경이 나오자 반가움이 여기 저기서 거품처럼 일어난다. 공연을 축하 해주러 와 기분이 좋다는 그녀의 신곡들이 깔끔하게 입맛을 돋우어준다.
박혜경의 노래가 마치고, 각종 연예 프로그램과 CF 출연으로 낯설지 않은 목소리와 얼굴의 프라임이 능숙한 말솜씨로 쇼케이스의 포문을 연다. 그새 무대 세팅 준비가 끝나고 일사분란하게 스크린에 오늘의 주인공들인 그들의 사진들이 펼쳐진다. 스크린이 서서히 올라가자 웅성거림을 걷어내는 펑키 브라운의 등장으로 함성이 걸려진다. 모즈룩을 연상케 하는 쭉 빠진 세미 정장과 머리 스타일, 훤칠한 외모와 호리호리한 체격이 한껏 음악을 보는 재미로 더해진다. 쉐이커의 흥이 잔잔하게 감도는 연주곡인 ‘Song for My Lady’가 끝나자 기타 소리가 안 난다며 조율을 하던 보컬의 엄주혁이 부드럽게 다음 곡인 ‘Everyday’로 넘어가자 여기저기서 환호를 보낸다. 안개가 스르르 퍼지면서 어슴프레한 저녁을 연상시키는 무대에 응수하는 피아노 선율과 기타의 멜로디가 인상적인 이번 앨범의 타이틀 곡이다. 앨범 작업하면서 가장 먼저 만든 곡이기도 하면서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소박한 사랑, 자연스럽고 미묘한 감정을 풀어냈다.
쉴 새 없는 무대 때문인지, 관객의 열기가 뜨거웠는지 베이스의 김경원이 더위를 감추지 못하고 옷을 벗자 여자 팬들의 좋아라 하는 끼약 소리가 페이소스로 터진다. 공연의 사회자인 프라임도 슬슬 궁금증을 벗겨내기 시작한다. “내츄럴 사운드 밴드, 펑키 브라운”이라는 그들을 각각 소개하면서 공연의 세션을 도와주고 있는 키보디스트를 두고 ‘대한민국 수퍼 건반’이라 칭하는 센스를 발휘하는 엄주혁. ‘펑키 브라운’이라는 이름의 어감이 좋다는 프라임의 말에 홍대 근처에 선배가 운영하는 카페에 ‘Brown’이라는 단어의 느낌이 좋아 짓게 되었다고 의외의 답을 내 놓기도 했다. 가끔 공짜 커피를 마신다며 슬쩍 웃으면서 ‘Funky’는 그루브감을, ‘Brown’은 동양인을 뜻한다는 구체적인 설명을 이어간다. 동양인도 훵크를 할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향기나는 그루브를 하겠다는 포부를 밝히는 모습에서 빛이 난다.
막간의 인터뷰가 끝나고, 펑키 브라운만의 톤으로 불러내는 클래식‘Just the Two of Us’가 울려 퍼지자 분위기는 한층 고양된다. 절묘하게 마무리를 다음 곡으로 이어가는 드럼의 박용석이 분위기를 캐치한다. “같이 춤춰요.”라는 말에 팬들은 하나 둘씩 몸을 들썩이며 ‘Polaroid’에 몸을 맡긴다. 마치 뜀박질치는 듯한 베이스의 그루브가 인상적이다. 중간에 서 있던 코러스가 밖으로 나오면서 눌려있던 소름이 확 돋아난다. 들썩이는 키보드와 관객에게 손짓으로 열광적인 호응을 유도하는 베이스와 드럼이 일심동체가 되어 리드미컬한 무대를 선사한다.
땀이 식기도 전에“나의 가장 친한 친구”라고 소개하며 출연한 하림 덕택에 땀방울은 다시금 도르륵 떨어진다. 선글라스와 가죽 재킷을 멋스럽게 걸치고 나와 ‘Old Friend’를 들려준다. 하림의 즉석 하모니카 연주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몇이나 된단 말인가. 자석같이 착착 달라붙는 두 사람의 호흡이 관객을 집중하게 만들고, 그의 하모니카 연주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제목 그대로, 몇 년 친구이든 세월을 숙연케 하는 따스한 우정이 묻어나는 곡이다.
이윽고 하림의 솔로 무대가 이어진다. 키보드에 앉아 가볍게 인사를 나누며 자신의 2집 앨범을 도와준 펑키 브라운에게 고마움을 표한 뒤, 나지막이 ‘출국’의 기억으로 관객을 되돌린다. 이따금씩 마이크 문제로 잠시 소란스러웠지만, 마치 그의 목에 마이크가 장착된 마냥 음성은 더욱 또렷하게 들린다. 가사 하나 하나에 진심이 우러나오는 무대에 사람들은 숙연해지고 하림은 미소로 답한다.
또 한차례 게스트의 시간이다. “이 사람의 음악을 듣고 바지가 커졌어요.”라는 소개 뒤에 의외의 출연진인 현진영이 나와 월척을 만났다는 듯이 관객들은 놀라움과 기쁨을 감추지 못한다. 한층 업그레이드 된 음악과 완숙미 넘치는 보컬을 선사하며 관객을 끌어들이는 카리스마는 전성기 때와 다를 바 없다. 교회에서 알게 되어 친한 동생들인 펑키 브라운의 형인 그도 앨범 마무리 작업 때 이들에게 도움을 받았다고. 마지막 곡으로‘흐린 기억 속의 그대’를 부르며 90년대의 정감 어린 후드열풍을 재생해낸다. 환호성이 무대를 찌를 무렵, 베이스의 김경원이 후드티를 뒤집어쓰고 깜짝 출연하는 재미를 연출하기도 했다.
#2. 좀 더 솔직해져 봐 너의 모습이 아냐 – ‘다신’
공연이 중반 이상을 달리고 있지만 관객들에게서 전혀 힘든 기색을 발견할 수 없다. 장시간 스탠딩에도 불구하고 발이 아픈 것도 잊은 채 구두를 신은 여성 팬들은 쉬는 내내 오빠들이 멋지다는 감탄사 일색이다. 새로운 의상으로 갈아입고 다시 등장한 펑키 브라운의 모습에 그녀들의 눈이 화사해진다. 이때쯤이다 싶었던 때 프라임이 나타나 멤버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기억에 남는 팬이 있느냐는 질문에 공연 중 선물로 밥통을 준 팬이 있다는 말에 장내에 웃음이 터진다.
담소의 잔재를 쓸어 내리는 ‘후회’라는 곡이 공연의 2막을 짙게 드리운다. 드러머 박용석이 가장 좋아하는 곡이기도 한 이 노래는, 누구나 들으면 다 알만한 MBC FM 로고 송의 목소리인 우현정의 보컬이 적재적소에 드리워져 소울풀한 매력을 한껏 발산한다. 공연 내내 코러스 라인에 서서 함께 노래한 우현정이 전면으로 나와 특히나 남학생들의 갈채를 받았다.
“노래 듣기 좋은가요?” 하고 수줍게 말을 건네는 엄주혁은 못내 아쉬운지 고마운 마음을 일일이 전한다. 팬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강조하면서 마무리를 하려는 펑키 브라운. 앨범의 마지막 곡이기도 한 ‘다신’으로 인사를 대신 한다. ‘Everyday’이후의 타이틀 곡으로 점쳐지는 중독성 강한 멜로디가 기억 속에 오래 침전된다. 마치 커피가 바닥을 보여 혀로만 남은 기운을 감지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아쉬움이 담담하지만 부드러운 보컬에 실리고, 거리의 불빛은 하나 둘씩 꺼질 듯한 기분이다. 그렇게, 다신 다음 곡을 기대할 수 없었던 분위기 속에서 ‘다신’이 새롭게 들려온다. 기대치 못한 선물을 받은 즐거움에 분위기는 더욱 더 뜨거워진다. 두터워서 깨어지지 않을 것 같은 앙상블은 경쾌함을 유지한 채 마지막까지 달린다. 쉬지 않는 잼의 향연으로 마무리를 짓는다.
역시나 관객들의 앵콜 외침이 한 번 이상은 나와주는 타이밍이다. 조금은 시간이 지체되는 기분이다. 정말 끝난 것일까? 하는 의구심에도 불구하고 우직한 팬들은 “앵콜! 앵콜!”을 목이 터지도록 외친다. 캬바레에서 봄 직한 반짝거리는 의상으로 기대를 저 버리지 않고 나온 펑키 브라운은 관객의 손은 머리 위로 올리며 박수를 유도한다. 연주는 한층 더 자유로워지고, 제대로 노는 분위기를 타면서 가수 나미의 히트곡인 ‘인디언 인형처럼’으로 이어진다. 멤버 전원이 큼직한 선글라스를 맞춰 쓰고 나타났고, 한 남자 코러스가 영화 ‘킬빌’을 연상시키는 노란 츄리닝을 입고 나와 행인 흉내를 내며 코믹 댄스를 선보인다.
“놉시다!”라고 외치며 장내를 클럽 분위기로 몰고 가는 펑키 브라운. 조용하던 키보드마저 기다렸다는 듯 ‘날아라 수퍼보드’의 손오공이 된 마냥 “치키치키챠카챠카쵸코쵸코쵸.”를 소화해내며 랩에 춤까지 곁들인다. 숨을 고를 여유도 없는 펑키 타임이 빙빙 돌아간다. 반짝이는 의상만큼이나 화려한 파트 별 솔로가 클라이막스를 이루며 관객에게로 던져진 기타 피크가 관객석 바닥에 떨어진다.
떨어지는 소리에 일어나보니 알람 시계가 덩그라니 바닥에서 울고 있었다. 스탠드만 고요히 밝아오는 늦은 밤. 다 마치지 못한 글의 중간 부분에 커서가 놓여진 노트북과 침 자국이 묻어난 장편소설이 읽은 데까지 구겨져 있었다.
‘배가 고파. 배가 고파. 양파를 썰고 계란을 깨뜨리고 하면서 그녀는 계속 소리쳤다.’의 구절에서부터 다시금 시작하는 뉴욕의 풍경과 사랑으로 번민하는 젊은 남녀들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따라간다. 바랜 갈색 톤이 인상적인 재킷 속 그들의 음악을 꺼내어 들어보니 꿈을 꾸는 듯하다. 나는 무엇을 듣고 있는 걸까. 꿈을 듣는 기분으로 아날로그의 질감을 코팅한 세피아 톤 속 도시남녀를 부르다 주인공이 된 기분으로 찬찬히 커피를 따라내렸다.
글쓴이_안현선
joeygottheblues@yahoo.com
*펑키 브라운 쇼케이스의 공연 취재를 허락하여 주신 [Insbase]의 정성엽 대리님께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펑키 브라운 1집 [Brown Days]
1. Song for My Lady (Inst.)
2. Everyday
3. 이런날
4. Paranoid
5. Old Friend
6. (Feat. 하림 & Kentaro Kihahra)
7. 이제는 그대와
8. Let’s Dance (Feat. 김성수 & 조명진)
9. Forever with You (Feat. 김반장 & 정상권)
10. Another Day
11. 후회 (Feat. 우연정)
12. 다신/The New Beginning (Feat. 김반장, 조명진 & 정상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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