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 17일 월요일

서른 아홉의 시네마(Cinema)



2020년 새해를 맞아 언제나 그렇듯 작심삼일이 될만한 새해 목표(New Year’s Resolutions) 리스트를 썼다. 작년도, 재작년도, 심지어 10년 전에도 그대로인 목표들은 독서와 영화 감상 목표량 채우기. 세월에 따라 우리는 미세하게 변하지만, 사람의 본질과 취향은 생각보다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낀다. 매년 같은 결의 혹은 결심을 하면서, 동시에 그에 대한 결자해지도 상당히 부지런하게 반복되어 온 인생이 싫어 1월부터 무작정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에 영상자료원을 드나들었다. 어차피 생각한 행동이라면 그 이후엔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일단 영화만 집중할 수 있는 장소로 몸을 실어 거기에만 파묻히기. 놀랍게도 두 달도 채 안되어 스무 편 이상을 봤고, 일종의 루틴(Routine)이 되어 매주 화, 목은 이미 상암동에 정착해버렸다. 거의 이십 년 넘게 의식불명의 상태였던, 시네 키드(Cine Kid)로서의 유년기 세포가 재생되니 그간 잊고 지냈던 아벨 페라라(Abel Ferrara)와 다시 만났고, 시드니 러멧(Sidney Lumet)이 왜 대단한 스토리텔러이자 감독인지 깨달았다.

초등학교 4학년 때인가 우연히 읽은 영화 잡지 스크린을 통해 영화를 글로 먼저 접했고, 중학교 땐 영화 감상반을 맡으며 데이빗 린치(David Lynch)이레이저 헤드(Eraser Head)’를 틀다가 감상반 전원을 수면 상태로 만들었지만 그 속에서 나만은 깨어있었고, 멋모르고 컬트라는 그 이름 하나로 열광했었다. 영화 감독이 되는데 수능 위주의 교육이 필요 없다고 생각해 자퇴를 결심했었던 고등학교 시절, 학창 시절을 간직하면서도 영화를 사랑할 수 있다는 세계사 선생님의 만류로 학교는 거의 걸치다시피했고, ‘독립예술제’, ‘십만원 영화제등의 영화제 자원봉사를 하며 영화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는 또 다른 씨네 키드(낯간지러워도 그 당시 나를 표현하는 가장 정확한 말이었다)들과의 매 시간을 소중히 여겼다.

당시 새벽 신문 배달 아르바이트로 용돈을 벌었는데, 월급날엔 하교 시간만을 목 빠지게 기다리다 종이 울리기 무섭게 신문 보급소로 뛰어들어 봉투에 정성스럽게 담긴 월급 18만원을 받은 뒤 버스를 타고 2시간 걸려 청계천에 갔다. 교복을 입은 어린 여자아이는 주로 잘 알려지지 않은 B급 영화들을 뒤졌고, 영화가 지나간 손은 먼지로 검어졌지만 그건 씨네 키드만이 누릴 수 있는, ‘더러워질 권리였다. 이탈리아 감독들의 B급 공포 영화를 비롯해 릴리아나 카바니(Liliana Cavani)비엔나 호텔의 야간 배달부(The Night Porter)’ 같은, 적어도 남들과는 차별된다고 생각하는(그러나 에로 영화로 오해 받는 / 영화의 분위기가 erotic인건 맞다) 영화들이 내 방구석의 한 켠을 차지했다. 늦은 밤, 불이 꺼진 방 안을 밝혔던 것은 에밀 쿠스트리차(Emir Kustrica)집시의 시간(Time of the Gypsies)’이었고, 당시 IMF로 가세 뿐 아니라 가족으로서의 끈도 상실한 집에서 영화는 나의 유일한 안식처이자 도피처였고, 치유제였다. 영화에 너무 빠져있는 나머지 인생 전반이 영화에 둘러싸일 수 있도록 만들었고 그 울타리 안에 있어야만 행복했다. 해체된 나의 가족으로 인해 상처받고 불행했기에, 가족에게 전혀 한 줄기 희망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영화에 미쳐있는 나의 십 대 시절 그 자체가 하나의 단편이고 언젠가는 곧 끝날 성장 영화이기를 바랐다.

그리고 이십 년이 훌쩍 넘어 지금의 나는 마흔을 목전에 두고 있지만 여전히 자아 실현을 갈망하고 나라는 미완한 존재에 늘 좌절한다. 일견 나는 아무 문제 없이 잘 살고 있다. 나는 요란스럽지 않으며 차분하고 적당한 이해심도 있다. 기존 체제를 인정하고 순응하며 살면서 적당히 나의 목소리를 내는 정도의 이상을 추구하지, 그 이상을 원하지 않는다. 결혼은 했지만 선택적으로 아이는 없다. 어쩔 수 없이 나이 때문에 가임의 기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내가 과연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지 늘 고민하며 늦추고 늦추다 여기까지 왔다. 하지만 더 정확한 이유는, 내가 되고 싶어하는 진정한 내 자신으로 살아가는 데 주저하다 흐른 시간이 너무 많아 지금이라도 나로 다시 살고 싶다는 욕심을 내려놓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회가 여성 또는 그 구성원에게 일률적으로 기대하는, 한 인간의 생애주기에 따른 책임감과 그에 걸맞는 행동을 하는 것에 있어 나는 낙제점이다. 그래도 살면서 범죄는 저지른 적 없고, 법을 어긴 적은 없으니 거기에 플러스 50점은 보태 나머지 50을 채운들 한 인간으로서의 자아는 채워지지 않을 것이다. 늘 채워지지 않은 결핍이 어쩌면 창작의 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파스빈더(Rainer Werner Fassbinder)의 영화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Angst Essen Seele Auf)’를 빌려 말하지만,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그럼에도 불안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힘으로 우리의 인생은 가장 창의적인 영화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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