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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2월 18일 화요일

Elephant

우리는 죽음에 많은 이유를 댄다. 너무 가난해서, 성적이 떨어져서, 우울해서...... 죽기 전에 훨씬 더 앞서 줄을 서 있는 그 많은 이유들이 고층 빌딩에 떨어져 나간다. 나는 죽음을 구구절절이 설명하는 영화엔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시종일관 흐르는 '엘리제를 위하여'만으로도 심장 소리를 먹먹하게 한다. 사실 레퀴엠은 도처에 널려있다.

A Lot Like Love

어쩌면 프랭클린 플래너도 무용지물이 되었을 법한 올리버의 5년 사업 플랜은 그 5년 뒤, 가진 것 하나 없이 그를 LA에 돌아오게 만든다. 언젠가 해변가에서 맥주를 마시며 그의 농아 형에게 신세한탄을 하는 올리버. 그런 그를 보고 형은 이런 말을 던진다.

"이게 바로 지금 네 인생이야."

참을 수 없이 가벼워 보이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네 인생이 지금 이래서가 아니다. 비록 이렇더라도 지금 살고 있는 것이 바로 내 인생이니까.

Elizabethtown

"좌절감은 5분간 맛본다. 그리고 모든것을 잊고 전진한다."


영화 '엘리자베스타운'의 클레어는 파산의 나락으로부터
아버지의 비고까지 겹친 악재를 이기지 못하는 드류에게
자신이 만든 지도를 거넨다. 그렇게 유해로 남겨진
아버지와의 여행이 시작된다. 켄터키에서 멤피스, 멤피스에서
클레어가 명시한 종착점까지 드류는 여행지를 돌며
유해를 바람에 건네고, 아버지의 바램은 그를 클레어에게 데려다준다.
어쩌면 나는 내가 느낄 수 있는 모든 감정들 중에서
오로지 '좌절감' 하나만 챙기지는 않았나.
그간의 옹졸한 마음이 빗물 씻기듯 흘러내리는 순간에

영화 속 클레어와 드류는 새로운 키스를 하고 있었다.

Rosemary's Baby

입구를 들어서면 저마다 숫자를 매긴 현관문이 있고, 그 현관문을 열면 방이 있고, 방 문을 열면 창문이 보인다. 문을 열어야 사람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폐쇄적인 공간. 뉴욕 중산층 아파트에 입주하게 된 로즈마리가 공포를 겪는 과정도 이런 아파트의 폐쇄적인 구조를 뚫고 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의문의 문(door)이 하나씩 열릴 때 마다 그녀는 이웃의 진실이 바로 악마였음을 알게 되고, 그 안을 바라보는 관객은 살인 장면 하나 없이도 치가 떨릴 정도의 공포를 느낀다. 공포란 그런 것이다. 은폐된 진실이 열림과 동시에 그 진실에 함께 갇히는 것.

Kids

시대를 반영하는 청춘물들, 특히 존 휴즈나 니콜라스 레이와 같은 중견 이상을 넘어버린 그들을 답습하기 보다는, 진짜 지금 아이들의 모습을 여지없이 담아내고 싶었고, 내가 원했던 '진짜 아이들 영화'를 하모니 코린의 사실적인 시나리오로 만들었다.

Kids by Larry Clark
영화를 찍고 싶다는 생각을 들게 해 준 'Kids'.
꼭 그 만큼의 영화를 내 스타일로 찍겠다는 욕심이 있었다.

지금도 물론 그러고 싶다.

Robert Downey Jr. in "One Night Stand"

"Life is an Orange." 라는 말과 함께 흑백 사진 한 장, 담배 연기, 재즈 음악의 선율처럼 떠난 Charlie,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관조적인 몸짓으로 새겨진 그의 웃음에서 때 아닌 '삶'의 신선함을 바라본다.
나는 아직도 인생은 오렌지라 중얼거리며

훗날에도 인생은 오렌지임을 믿을것이다.

담배피는 잔느 모로

'400번의 구타'도, '피아니스트를 쏴라'도 프랑소와 트뤼포라는 그 이름 하나 때문에 멋모르고 보다 졸던 시절, 그래도 '쥴 앤 짐'은 재밌게 봤다. 영화관에서 본 까닭인지는 몰라도 그 큰 화면에 세 사람이 철다리 비스무리한 것을 달려가는 그 유명한 씬이 아직도 어른거리고, 해변가에서 놀던 두 남자와 한 여자의 관계는 어린 내겐 참 애매모호한게 프랑스 영화란 다 그런건가 하면서 끄덕이게 만들었던 이상한 마력을 지닌 흑백영화.

씨네키드들에게 어쩌면 타르코프스키의 구원이 제대로 된 구원이었을 수도 있고, 에이젠슈타인이의 유모차 씬이 두고두고 공부해야 할 미장센일 수도 있다. 예술 영화 '쥴 앤 짐' 역시 화면 하나 하나에 사랑의 기억을 뭔가 특별한 장치로 담아냈을 수 있겠다며 뚫어지게 쳐다봤지만 정말 특별한 거 하나, 잔느 모로의 담배피는 장면 외에는 없었던 것 같다. 쥐뿔도 모르니까 없었겠지만, 잔느 모로가 담배피는 장면 만큼은 확실히 안다. 화면을 담배 연기로 꽉 채울만큼 멋있고, 매혹적이었다는 것을…

Michelle Williams

데스티니스 차일드의 미쉘만 알고 있다면 제목만 보고서 그 미쉘 윌리엄스가 마이클 잭슨처럼 백반증에 걸렸다거나, 성형수술을 했느냐의 오해가 있을 수 있겠다. ㅋ 이 녀자는 리얼 블론드에, 백색 치즈같은 뽀얀 살결을 자랑하고 있는 백인 미쉘 윌리엄스다. 외국 드라마를 좋아했던 사람이라면 공포영화 '스크림'의 각본을 썼던 케빈 윌리엄스(얘도 윌리엄스네...)가 제작해 90년대 중반 당시 큰 호응을 불러 일으켰던 'Dawson's Creek'을 기억하는지? 스티븐 스필버그같은 영화감독을 꿈꾸며 영화가 인생의 전부라 믿는 소년 도슨의 성장을 중심으로 강 건너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도슨과 수다를 떨기 위해 노젓는 뱃사공을 자처하며 ㅋ 웬만한 카누 선수 저리갈 정도의 뒷심으로 도슨의 방을 들락날락 거렸던, 곧 있으면 톰 크루즈의 아내가 될 케이티 홈즈가 조이라는 캐릭터로 나온 이 드라마 말이다.

남자가 예술을 하면(그게 순수든, 대중이든) 여자들은 자석처럼 뭔가 끌리는지 첫 시즌의 골자는 도슨이 소꼽친구인 조이에게 가느냐, 아니면 뉴욕에서 온 매력적이지만, 가슴 한구석엔 부모에 대한 적개심으로 가득차 일찍부터 성에 눈을 뜨고 마약을 일삼았던 롤리타같은 젠에게 가느냐였다. 바로 그 젠을 연기했던 배우가 사진의 미쉘 윌리엄스다. 젠의 캐릭터는 시즌을 거듭할수록 점진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는데, 사실 시즌2에서까지 그녀의 정체성은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한 케이프사이드라는 동네에 어울리지 않게 어두웠고, 도슨과 밀고 당기기를 보여주면서 자신의 학업에 대해 고민했던 조이의 활기차면서도 반듯한 모습에 죽어가는 듯했다. 솔직히 난 조이가 부러우면서도 재수없었다. ㅋ
그런 잘난 조이가 시즌3에서는 젠에게 역전당하기 시작한다. 산전수전 다 겪어본 이 뉴요커의 기질을 백분 살리자는 의미에서 젠에게 지운 우울을 한꺼풀 떼어내고, 쿨하고 멋진 '시스터'같은 존재로 부각시키게 된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시즌2에서 약간 살이 쪄 보였던 젠에게서 정체되어 있던 붓기가 쏘옥 빠진 듯 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법을 배우고, 온종일 반항만 했던 할머니에게 말을 걸 줄 알게 되며, 사춘기 소년 소녀들이 가질법한 고민으로부터 일찍이 작별한 맞언니처럼, 그야말로 저런 멘토 하나 있었음 좋겠다는 소시민적인(?) 바램을 불어넣은 것이다.
케이블 채널인 OCN에서 시즌5까지 방영되다(5인지 6인지 가물가물) 수입 문제로 중단되었고, 그 이후로 미쉘 윌리엄스를 보기란 가뭄에 콩나기였다. 그런 가운데 작년 11월 씨네큐브에서 빔 벤더스가 쓸쓸하고 처절한 미국의 자화상을 다룬 '랜드 오브 플렌티'에 미쉘 윌리엄스가 나왔으니 어찌 반갑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다작을 하지 않는 그녀는 그 이후로도 '브로크백 마운틴'같은 멋진 행보를 선택하여 흐뭇하게 하더니, 브로크백 마운틴 촬영으로 만난 히스 레저와 트레일러에서 사랑을 나누고는 그와 결혼하여 지금은 한 남자와 그들의 아기를 키우며 옹기종기 잘 살고 있다. 미쉘 윌리엄스의 아름다워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팬으로써 상당히 즐겁다.

2020년 2월 17일 월요일

Harmony Korine [Julien Donkey-Boy]

Julien Donkey-Boy 
(국내 미출시 / Harmony Korine / Harmony Korine / 391 Productions, Forensic Films, Independent Pictures / 1999)

Ewen Bremner as Julien
Chloë Sevigny as Pearl
Werner Herzog as Father

Evan Neumann as Chris

저번 주 목요일, 하모니 코린(Harmony Korine)의 'Julien Donkey-Boy'를 봤다. 최근에 산 로저 에버트(Roger Ebert)의 평론집에 수록된 영화 리스트를 참고해서 보기도 하지만, 거의 대부분은 의식의 흐름에 맡기는 편이다. '미국 인디 영화. 뉴욕 배경. 하모니 코린' 이런 식이다. 자료원의 데이터 베이스에서 감독 이름을 검색하면 소장 리스트가 펼쳐진다. 코린이 각본을 쓰고 래리 클락(Larry Clarke)이 연출한 '키즈(Kids)'는 고등학교 시절 문화학교 서울에서 봤다. 사실상 코린이 연출한 영화는 처음 경험한 것이다. '구모(Gummo)'가 코린의 연출작 중 꽤나 큰 찬사를 받았지만 평단이 갈린 '줄리엔 동키 보이'를 고른다. 덴마크 출신 감독들의 작은 영화 운동이자 반란이었지만 결과적으로 흐지부지된, '도그마 95' 서약 하에 만들어진 최초의 미국 영화라는 이유에서다. 

약 90분 동안 비선형적 내러티브 구조를 취하는 '줄리엔...'은 확실히 불편한 시네마다. 영상의 질감은 거친 조약돌의 표면같아(영어로는 'grainy' 하다고 함) 인물의 형체는 모호하며, 조현병에 걸린 줄리엔을 기점으로 그의 가족들은 하나같이 뭔가 '깨진' 구석이 있다. 직업이 없어 보이며 하나 이상의 결함 또는 타인의 시선에서 결코 정상은 아니라고 느껴지는 줄리엔 가족들의 기이한 행동이 영화의 주요 동력이다. 

'줄리엔...'에서 '계획'이라는 개념은 들어설 자리가 없다. 그저 하루 하루 살아지는 인생을 사는 줄리엔 가족들에게 삶은 자신들의 기이한 행동과 병이 만들어 낸 '현상'에 불과하다. 나치 숭배를 연상케하는 줄리엔의 히틀러 따라하기나, 세상을 떠난 것으로 사료되는 줄리엔의 엄마, 즉 줄리엔의 아버지에겐 아내였을 그녀를 잊지 못하는 것을 넘어서 줄리엔의 레슬러 지망생 형에게 엄마의 드레스를 입으라고 강요하는 아버지(베르너 헤어조그!). 줄리엔의 아이를 가진 그의 여동생 펄(클로에 세비그니)은 수화기 너머로 죽은 엄마를 연기하며 줄리엔의 모성 결핍을 채워준다.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레슬러 지망생 형의 외롭고 고된 훈련은 경제적 지원 없이 오기만 채워주려는 아버지로 인해 기약 없는 몸짓에 불과해 보인다. 또한 하프를 퉁기는 펄에게 예술 나부랭이를 한다며 재능 없는 화냥년(slut / 줄리엔의 아이를 임신한 것 때문에 나온 말이라 보인다)이라 비난한다. 그에게는 아내를 잃었다는 속사정이 있고, 아버지의 가학적 태도에 줄리엔과 그의 형제들은 그저 묵묵히 받아들일 뿐이다. 어차피 지나갈 일이지만 반복될 일이기에 관계에서 일어나는 난장은 무미건조한 '현상'일 뿐이다. 그럼에도 줄리엔의 집안은 '여하튼' 그들만의 방식으로 굴러간다. 만삭이 된 무거운 몸을 이끌고 아이스 스케이팅을 나간 펄이 다리를 헛디뎌 넘어진다. 아이는 유산된다. 줄리엔은 이미 숨이 끊어진 핏덩이를 안고 병원 밖으로 도망친다. 집 안 침대로 들어가 이불 안에서 아이를 부둥켜 안고 기도를 한다. 근친상간도, 아이를 잃은 것도, 오프닝 씬에서 거북이를 주지 않는 꼬마 소년을 우발적으로 살해하고 땅에 묻으며 신에게 자비를 구하는 줄리엔의 기도도 이 모든 것들이 영화 내내 해프닝(Happening) 내지 삶의 현상처럼 그려진다.

모든 영화 소품은 현장의 촬영지에 있는 것으로만 해결해야 한다는 도그마 95의 서약이 의의하는 바는, 환상을 심어주거나 현실을 고발하기도 하는 영화 이전의 태초의 목적, 즉 '활동 사진'으로서 지금 이 순간, 움직이는 모든 현상에 인위를 가하지 않되, 현장에서 감독이 발휘할 수 있는 최대의 창의력을 실험하는데 있지 않았나 한다. 물론 코린이 도그마 서약을 온전히 지킨 것은 아니며, 이후 도그마 서약 아래 제작된 많은 영화들이 그들의 규칙을 어겼다. 한계를 설정함으로써 영화의 장르적 한계(장르를 배제하는 것 역시 서약 중 하나)를 뛰어넘으려 했던 이들의 실험은 과거의 해프닝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창작의 '현상'을 담아낸 필름은 영원히 남아 시청자에게 '불편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인간이 왜 한 번 쯤은 관습에서 벗어나봐야 하는지, 왜 스스로 상황적 제한을 두면서 예술을 추구해야 하는지 물음표를 던지며 정적인 감상의 프레임에서 나올 것을 요구한다. 자고로 모든 예술 작품은 불편해야 제 맛이다.

오, 마이 위노나

위노나에게,

위노나, 혹자는 친근감을 갖고자 노니라고 불리는 위노나. 그렇지만 난 노니라고 부르는 게 영 내키지 않아요. 무언가 그렇게 부르는 짓은, 친근감을 혹사시키는 아는척인 것 같아요. 뭐 별소리는 아니지만 난 위노나라 부르는 게 좋아요.

사실 위노나 매니아들에게는 필수작이라 했던 비틀 쥬스는 못봤답니다. 그냥 팀 버튼이 안 땡기는 날도 있어요. 난 과히 공상과학적이지도, 뛰어난 상상력을 지니지도 못한 사람이기에 가끔은 팀 버튼의 괴기한 상상력이 부담스러울 때가 있어요. 그렇지만 최근에 읽은 '굴 소년의 죽음'은 페이지 한 장, 한 장을 넘기며 울었어요. 사람들로 득실거리는 교보문고의 한 가운데에서 말이죠. 마이클 키튼과 지나 데이비스의 딸로 나왔었나요? 비틀 쥬스는 그냥, 위노나의 필모그래피 중 하나인거죠.
죠니 뎁을 싫어하는 소녀는 없겠지만, 난 당시 '21 점프 스트리트'의 아이돌이었던 죠니 뎁에게도 관심이 없었어요. 그러나 '가위손'은 그저 당신이 좋다는 이유 하나로 봤어요. 어울리지 않았다고 사람들이 혹평했던 금발을 했지만 브루넷에 지쳐있던 나는 가위손의 금발머리에 찬사를 보냈습니다. 80년대 금발들을 떠나보낸 브루넷 스타들 중 한 사람이었던 당신이 금발을 했다는 거 자체가 중요했어요.
10대 소년들과 줄곧 있던 당신이 사각거리는 드레스 폭에 싸여 다니엘 데이 루이스 같은, 광기의 카리스마를 지닌 아저씨와 함께 한 것도 신선한 충격이었죠. 마틴 스콜세지가 왜 당신을 선택했는지 알 수 있었어요. 캣우먼도 당신 앞에선 꼬리를 내렸습니다. 말 그대로 위노나가 있었기에 그저 순수해 보이기만 했던 '순수의 시대'였어요. 하얀 빛이 무색해지는 그 웃음에 골든 글로브는 빛나는 트로피를 당신 손에 쥐어주었죠.
그렇지만, 왜 나는 당신이 조금은 빗나간 사람의 역할을 하고 있을 때 안도감을 느끼는지 모르겠습니다. 요즘의 위노나를 보고 있노라면 나이는 조금 먹었지만, 조금도 자라지 않은 연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 안에서 시퍼렇게 멍이 든 옛날에 대한 애착이 보입니다. 먹고 살려면 별 수 없나봐요. 벤 스틸러는 코미디라는 치질에 걸렸습니다. 마이클 리만과는 연락 해 봤나요? 혹시 팀 버튼은 죠니 뎁에게 "야, 요즘 위노나는 뭐하고 사니?"라는 못미덥지만, 그래도 애정이 느껴지는 말 한마디 안했다고 하나요? 스크린의 당신에겐 '당신'이 없어서 영화보는게 재미 없어졌어요.
나는 아직도 이따금 노트북에 저장된 '웰컴 홈, 록시 카마이클'의 당신 사진을 봅니다. 저런 지랄삼발 머리에 조금은 어둠이 짙게 깔린 불만 많은 소녀의 모습이 난 좋아요. 가끔 다른 사진을 찾기 위해 야후를 들어가면 당신을 위한 성전들은 부서졌고, Times New Roman 글씨체와 야광색이 번쩍대는, 인터넷이 생기기 시작한 시대에나 볼 법한 싸이트에선 아직도 당신은 '록시 카마이클'의 딩키였고, '헤더스'의 베로니카로 남아있어요. 루카스를 사로잡던 20세기 보헤미안 꼬마, 온 몸에 다이너마이트를 두르고 자신과 이 세상이 폭파되었으면 좋겠다는 JD의 멸망을 지켜보던 베로니카, 자무쉬를 숨 죽이게 한 줄담배의 택시 드라이버 아가씨, 캠코더를 들이대며 세상에 F 워드를 날리면서, 한편으로 그저 그런 삶에 기꺼이 숨 한 번 내쉬고 춤을 췄던 릴레이나. 과거를 잊지 못하는 현재 부적응자, 나 같은 사람이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줘요. 더 낵의 'My Sharona'가 흐릅니다. 아무도 모르게 고개를 까딱이고 있습니다.

2011년 9월 8일 목요일

다시 가 본 맨하탄: 영화 [Manhattan]
















아주 오래 전에 사 놓고 바쁘다는 핑계로 열지 않은 우디 앨런의 79년작 [맨하탄, Manhattan]을 플레이어에 걸었다. 흑백 화면에 담긴 뉴욕 맨하탄의 풍경이 조지 거쉰의 ‘Rhapsody in Blue’ 선율과 함께 펼쳐지자, 그는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그는 뉴욕 시를 흠모한다. 그에게 계절에 상관없이 뉴욕은 항상 변함이 없으며 조지 거쉰의 음악이 고동치는 그런 곳이다. 그는 맨하탄에 대해 모든 것에 지나치게 낭만적이다. 그는 현대 문화의 부패의 상징이지만 뉴욕을 흠모한다. 그는 뉴욕을 사랑하며 영원히 그럴 것이다.’

눈을 감고 잠시 추억에 젖었다. 우디 앨런을 좋아하지만 그의 영화를 오랜만에 꺼내든 건 순전히 뉴욕 때문이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그의 필름을 통해 다시 만난 뉴욕은 실로 감격적이었다. 나는 5년 동안 일한 직장을 그만두고 한 달 동안 미국 여행을 갔다. 일정의 반은 친지들을 만나는 것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뉴욕이었다. 누군가 나에게 “뉴욕은 단지 뉴욕일 뿐이야. 뉴욕을 미국이라고 생각하지마.” 라고 했을 때의 그 묘한 이질감-뉴욕에 살지 않는 누군가도 뉴욕을 매우 개별적인 그 자체로 여기는 것 ‘자체’가-도, 뉴욕 공립 도서관을 갔을 때도 그들의 인사가 “안녕?”이 아닌, “웰컴 투 뉴욕.”인 것, 그 이상하리만치 특이한 경험은 모두 그 곳에 있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그 곳 어디에선가 클라리넷을 불고 있을 우디 앨런과 같은 구역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소박한 특권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섹스 앤 더 시티(Sex and the City)’의 캐리 브래드쇼가 잠시 파리로 눈을 돌렸을 때도 “난 뉴요커에요.” 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뭇 여성들의 부러움과 환호성을 받는, ‘뉴욕=화려함=동경’과 같은 성질의 것과는 달랐다.

‘신세계는 유럽이 꿈꾼 자기 자신의 위대한 모습에 불과했다. 그것은 신을 닮고 싶고, 그러면서도 아주 아주 부유해지고 싶다는 열망이었다. 이런 이상한 ‘절대적인 것의 혼합’을 뉴욕 시티만큼 잘 구현하고 있는 곳도 없다. 뉴욕은 신세계의 모든 불가사의, 혼란, 모순이 집결된 것이다. 뉴욕은 섬 위에 세워진 하나의 이상적인 도시이다.’ (‘뉴욕: 한 도발적인 도시의 연대기’ 중에서)

TV 프로그램 쇼의 작가지만 자신의 신념과는 다르게 엉망진창으로 돌아가는 쇼를 못 견디고 나온 40대의 아이작(우디 앨런)에게 아직 세상은 그럭저럭 살 만하다. 그가 좋다며 쫓아다니는 17살의 소녀 트레이시가 있고, ‘이혼남의 아들이 나중에 더 잘 나간다’라는 티셔츠를 입으며 가끔은 전처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만나기도 하고, 그의 친한 유부남 친구 예일(마이클 머피)의 애인이자, 필라델피아 출신이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다니는 메리(다이앤 키튼)와 알게 된 것도 그의 삶에서는 나름 즐거운 사건이다. 다만, 전처 트레이시(메릴 스트립)가 그의 ‘밝히기 민망한’ 사생활 내용을 책으로 쓴다고 한다거나, 열일곱 트레이시(매리얼 헤밍웨이)에게 느끼는 ‘도덕적으로 부적절한’ 관계에 대한 고민이 그를 괴롭히는 것뿐이다. 자신이 환멸을 느낀 일터에서 불평을 한껏 쏟아내고 실직한 뒤, 후회하면서 ‘그건 쿨한 짓이었어.’ 라고 자조적인 위로를 하고, 때로는 전처의 ‘결혼, 이혼 그리고 자신 본위’라는 책을 통해 자신의 이전 성생활까지 까발려지는 신세지만, 아이작은 그의 ‘트레이시’와 그의 또 다른 자아 ‘메리’에게 있어서는 자상하고, 투덜대고, 솔직하고, 소심하지만 거침없는 지적 매력을 지닌, 그야말로 ‘그들이 사랑하는 뉴욕’의 남자이자, 그들이 사랑하는 ‘뉴욕의 남자’다.

영화 [맨하탄]은 뉴욕의 등장인물이 배경이자, 뉴욕이 배경인 아이러니를 갖고 있다. 우디 앨런 영화의 페이소스인 주인공들의 대화가 영화의 주를 이루는 것도 있지만, 영화는 그들이 진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동안에도 뉴욕의 순간에 몰입한다. 가령 예일이 메리에게 그들의 부적절한 관계를 정리하자는 심각한 의사를 전달하는 동안, 메리를 향한 카메라는 그녀 뒤의 식사 중인 사람들과 그 순간의 레스토랑 분위기를 포착한다. 한편, 메리에게 이성적으로 끌리는 아이작과 메리의 행복한 순간들에는, 영화에서의 뉴욕은 더없이 아름답다. 그들의 순간은 ‘퀸스보로 브릿지’에서, ‘센트럴 파크’에서, 그리고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서, 마치 엘리엇 어윗(Elliot Erwitt)의 아름답고 온화한 뉴욕 사진처럼 빛난다.

‘뉴욕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출구를 찾아 헤매는 곳, 그리고 영원히 방황하도록 선고 받은 곳이다. 세상의 어떤 곳도 뉴욕보다 진실하지 않다. 아무리 보기 흉해도 우리는 뉴욕을 당당하고 정열적인 아름다움을 지난 도시, 영원한 욕망의 장소로 기억한다. 또한 뉴욕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인생이 영광스럽게 채워지고, 그들의 배고픔이 충족되리라는 느낌을 안겨주는 곳이기도 하다.’ (토마스 울프)

아이작과 그의 주변 인물들은 영원히 방황하도록 선고 받은 도시에서 서로의 관계를 재정립하고, 그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한다. 아이작-메리-예일 그리고 트레이시. 아이작은 자신과 왠지 모르게 닮은 메리에서, 런던으로 떠나려 하는 트레이시를 붙잡으며 그녀의 마음을 돌릴 임기응변을 두서없이 내뱉는다.

“내가 좋아하는 네 모습이 변하지 않길 바랄 뿐이야.” (아이작)

“사람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아요. 사람에게 믿음을 좀 가져봐요.” (트레이시)

영화 [맨하탄]은 끊임없이 긴장하고 생존해야 하는 도시의 생활 속에서, 나름 긴장을 풀며 삶의 균형(일, 사랑, 적당한 여가)을 갈구하는 뉴요커들의 농담과 실수를 로맨스로 풀어낸다. 그러나 이 모든 스토리 속에서 우디 앨런의 애증 어린 로맨스를 받는 주인공은 바로 뉴욕이 아닐까. 이 영화를 두고, 그가 사랑하면서도 증오하는 도시에 대한 존경인 동시에 비판이 되기를 원했다는 우디 앨런의 말처럼 말이다.

1시간 36분의 영화 길이만큼 여행의 기억은 릴처럼 감겨지겠지만 확실한 것은, 뉴욕은 영화에서도, 누구든 그 곳을 한 번이라도 가 본 사람의 기억에서도 오만하지만 아름다운 도시로 남을 것이다. 그 오만에는 거부할 수 없는 뉴욕이라는 그 존재 자체에 대한 자긍심이 있기에 매혹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뉴욕이 벌써부터 다시 가고 싶다고 고백하는 중이고, 영화 [맨하탄]은 그런 마음을 달래주는 최상의 영화다.

2011년 7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