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 14일 금요일

연진 [Me and My Burt]



강박관념을 잘게 썰어 바나나 쉐이크를 만들고
초등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정해진 과학 독서 중 한 권을 택하고 그에 대한 독후감을 쓰는 대회가 교내에 열렸다. 그 때 반 친구가 ‘서로의 독후감을 써주자.’라는 제안을 한 것. 그리하여 둘은 각자 선택한 책을 읽고 원고지를 쓴 뒤 교환했다. 나는 그날 밤 새 원고지에 옮겨 적으면서 상당 부분을 수정한 뒤 제출했고, 결국 상을 받았다. 그 친구는 울며불며 자신이 쓴 거라고 박박 우겼지만 대회는 이미 끝난 뒤였다. 다음 날 등교를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친구의 글을 어떻게든 내 글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밤을 새다 코피를 흘린 나의 모습이 떠오르는 지금 생각해보면 그 글은 백 퍼센트 나의 글이 아니었다. 녀석의 제안에 동의한 뒤로는 내 것이냐, 네 것이냐는 아무런 의미도 없던 것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앞에서 말한 나와 같은 소유욕에 사로잡힌다. 누군가의 미니 홈피에 예전에 내가 등록했던 음악이 흐르면 ‘얘 뭐니?’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내가 먼저 알았는데 감쪽같이 너만 아는 음악이 되어버렸구나 하는 쓸데없는 망상. 그러던 어느 날엔가 그 망상을 뒤집고 너나 할 것 없이 감수성 넘치는 소년 소녀의 방에는 연진의 음악만이 돌고 또 돈다. 그런데 어디서 많이 듣던 음악이다. CF 배경 삽입곡으로 더 친숙한 리타 칼립소의 ‘Paper Mache’가 흐르고, 한국인이 좋아하는 팝송 베스트에 꼭 든다는 BJ 토마스의 ‘Rain Drops Keep Falling on My Head’가 나온다. 누군가의 배경에도, 누군가의 카페에도 버트 바카락이 흐르는 데 나의 음악이라 고집하는 불통은 없다. 너도 나도 누구나 아는 달콤한 멜로디에 장벽을 걷고, 그저 소녀의 목소리를 간직한 소녀 아닌 연진의 바나나 쉐이크를 시음할 따름이다.
솔로 첫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자작곡이 아닌 21세기의 위대한 작곡가 노래를 선택한 연진의 는 영국 글래스고의 터줏대감 밴드로 활동중인 BMX 밴디츠(BMX Bandits)의 더글라스 T. 스튜어트가 제작을 맡아 묵묵히 멜로디를 따라가는 연진의 보컬에 한층 자연의 바람을 실어준다. 씨디를 틀고 찬찬히 귀를 움직여본다면 다양한 소리를 만날 수 있다. ‘Reflections’에서 나오는 경쾌한 휘파람, 산타의 호호호 하는 너털웃음과 입으로 내는 겨울 바람 소리가 들리는 ‘The Bell that Couldn’t Jingle’, 소금통을 흔들어 깨알의 흔들리는 미세한 소리까지 축복하는 ‘Paper Mache’등 모든 노래가 사람들의 소중한 흔적이고 기억이다. 또한 BMX 밴디츠 멤버 전원뿐만 아니라 글래스고 지방 사람들인 벨 앤 세바스찬(Belle and Sebastian), 틴에이지 팬클럽(Teenage Fanclub)까지 기꺼이 버트 바카락의 주옥 같은 선율을 추억하기 위해 모였다. 영화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My Best Friend’s Wedding)’을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박자도, 음정도 엉망인 캐미가 노래를 불렀을 때 그 누구보다 열렬한 환호과 뜨거운 분위기를 이끌어낸 순간처럼. 완벽한 순간, 완벽한 재연이 아닌 가슴 뭉클한 앙상블이 번져 오른다.
다시 한 번 씨디를 꺼내어 들어보는 연진의 버트 바카락은 간만에 만나는 편안한 즐거움이다. 눈을 감고 들으며 스르르 잠이 들자 “그 상은 내 꺼야, 내놔!” 라고 소리치는 작은 꼬마가 앞에 나타났다. 나보다 몇 뼘은 더 작은 어릴 적 내 친구. 슬그머니 다가가 아이의 얼굴만한 사탕을 건넸다.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상을 버린 채 핥는 사탕의 달콤함처럼, 그렇게 연진이 다가온다.
안현선
joeygottheblues@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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