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며칠간 질펀한 비는 고사하고 흐릿한 기운에 소복히 쌓여버린 이슬 같은 빗방울은 거리를 나서기엔 적당할 만큼의 인기척을 나타냈다. 구정물에 비쳐진 매무새를 점검하고 음악이 들릴 공간을 향해 나선다. 근데 웬일인걸. 마치 공연장에 쳐진 바리케이트 마냥 쉴 틈도 없이 질서 정연하게 줄을 서 있는 21세기 그와 그녀들은 부지런했다. 캐스커의 공연을 봐야 한다는 그 일념 하나로! 그렇게 나의 7월 1일은 뒤늦은 발걸음을 재촉하며 많은 인파들과 함께 공연장에 빼곡히 채워져 갔다.
한 여름밤의 꿈을 꾸는 사운드
Casker [Skylab] 공연에 가다
Casker - Skylab
01/07/2005
7:30PM
대학로 SH Club
객석 전부가 스탠딩인 클럽 안은 대부분 주말에 짬을 내어 온 20대의 젊은 남녀들의 열기로 가득 찼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나의 옆자리인 젊은 엄마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와 공연 에티켓을 알려주고 있었다. 게으른 2층의 나를 웃음 짓게 한 그들의 스냅 샷스러운 장면은 캐스커의 폭넓은 인기를 실감하게 해 주었다.
어수선함이 언제 가라앉을지 모르는 몇 분 몇 초가 흐르고 어디서 들려오는 보컬의 나즈 막한 음성이 공연의 시작을 두드리더니, 캐스커 팬들에겐 너무나 익숙한 '선인장'의 인트로가 나오면서 객석에선 환호하기 시작했다. 원곡의 편성과는 전혀 다르게 조심스럽게 보컬의 목소리로 포문을 연 아이디어가 멋지다는 생각을 하다가 어쿠스틱 사운드에 흔들리는 퍼큐션과 쉐이커의 달그락 거리는 리듬에 취해버리기 시작했다. 나른하게 울려퍼지는 키보드 선율에 눈을 감다가도 다분히 일렉트로니카적인 느낌의 반복에 사람들은 몸을 까딱여 본다. '선인장'에서 가장 매력적으로 느껴졌던 중반부, 음악이 멈추다 다시 협연을 이루는 부분에선 관객들은 왠지 모를 카타르시스를 느꼈고, 보컬 또한 손을 움직이며 장단을 맞춰가며 첫 무대를 선보였다. 잠깐 다른 믹싱을 틀어 웃음이 새어나오기도 전에, 노란빛 조명으로 분위기를 돌리며 'midnight moments'가 이어졌다. 고즈넉한 느낌으로 일관하는 보컬과 미니멀한 느낌의 영상이 무대 뒤에서 재생된다.
노래가 끝난 뒤, 아른함을 뒤로하고 보컬(융진)이 서두를 열었다. 그녀는 흐린 날씨에도 불구하고 객석을 메운 이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며 '7월의 이파네마 소녀'를 거닐기 시작한다. MR로 '걷고 있었어' 하는 시작 부분의 코러스가 나오고 제각각 움직이는 보라색 조명이 아기자기함을 더한다. 흐린 하늘에 푸르름을 옅게 머금고 있는 바닷가의 기분을 느끼다가, 드럼 세션이 퍼큐션으로 이동하며 더해지는 사운드의 풍성함은 밝아오는 해변의 기운을 느끼게 해 준다. 상쾌하게 몸을 들썩이는 관객들과 바닷물, 갈매기 소리는 휴식을 꿈꾸게 한다. 다음으로 '고양이와 나'는 앨범에서 두 번째로 실린 곡으로서, '7월의 이파네마소녀'의 청량함을 연속시켜 주었다. 중간 중간 비브라폰이 사뿐히 다가오는 듯하면서 살포시 감싸는 DJ와 보컬의 앙상블은 앨범에서 듣던 것과는 또 사뭇 다르다. 시종일관 웃는 보컬 융진의 모습이 보이고, 샤방한 베이비 목소리처럼 들리는 또 다른 보컬 코러스가 아기자기함을 선사한다.
이어서 안토니오 까를로스 조빔의 'corcovado'의 음악을 캐스커식의 드럼앤베이스 믹스로 듣는 이색적인 무대가 있었다. 삼바와 쿨재즈를 결합한 보사노바의 창시자인 조빔의 음악을 연주한다는 것은 그들 나름대로의 큰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체적으로는 라운지를 표방했지만, 이번 앨범 곳곳에서 들려지는 보사노바는 일렉트로니카적 감수성과 맞물려 캐스커가 들려줄 음악적 한계란 없음을 말이다. 가벼운 몸짓들이 오고가는 가운데 리더이자 디제잉을 맞고 있는 준오의 믹싱이 펼쳐지면서 보컬의 재지(Jazzy)한 창법이 귀를 깨웠다. 연주가 끝난 후, 묵묵히 연주만 하던 건반주자인 진욱이 말문을 열었다. 처음으로 음악캠프(MBC)라는 곳을 나가게 되어 양복을 입어서 불편하고 덥다는 그의 농담 섞인 불평에도 더위에 지친 관객들은 즐거워만 했다. 개인적으로 존경한다는 류이치 사카모토의 'Tango'가 연주되었는데, 조빔과 모렐렌바움 부부(보컬, 첼로)와 함께 작업한 앨범에 수록이 되어있다.
숙연하고 아름다운 분위기가 지나가고, 리더인 준오의 입담을 엿볼 수 있었다. 관객들에게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대학로 등지에서 세션만 해봤는데 이곳에서 캐스커의 콘서트를 열게 될 줄 몰랐다' 라고 밝힌 그는 시종일관 겸손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수줍은 가운데에 유머를 뱉어낼 줄 아는 센스를 지니고 있었다. 음악을 만들 때 마음속으로 떠올려지는 이미지를 중요시 한다는 그의 말마따나 아코디언의 구슬픈 멜로디가 화답하고, 'je t'aime' 라는 말을 하는 허스키한 남자의 목소리가 반복된다. 그렇게 '어느날 pt1'의 이미지즘은 마치 프랑스 흑백 영화를 보는 것 같다. 캐스커의 홈페이지 배경 음악으로 쓰고 있다는 '어느날 pt2'가 바로 진행되고, 비오는 소리와 겹쳐지는 여자의 웃음소리는 묘하게도 영상과 일치한다. 비가 온 뒤의 고속도로를 끊임없이 달리는 움직임과 사운드는 Robert Miles의 'Chidren' 뮤직 비디오를 연상시키며, 불어로 오고가는 남녀의 다이얼로그에 덧입혀진 바이올린의 흐느낌이 사랑의 슬픔처럼 묻어난다.
절판이 되어 아쉬워했던 1집의 수록곡인 'skip'에 이어, 장르를 얘기할 때 고민이 많아서 그냥 멋지게 보이고 싶어 '장르에 구애없이 음악을 한다' 라고 말한다는 DJ 준오의 농담과 딱 맞아떨어지는 일본 밴드 Shiina Ringo의 'Stem'을 본인이 직접 기타를 잡고 연주를 하여 많은 관객들의 박수를 받아내기도 했다.
잠시 쉬는 동안 게스트의 show time이 진행되었다. 거칠지만 날렵한 말솜씨로 관객들과 빠르게 소통할 줄 아는 힙합 듀오 UMC의 라이브가 한바탕 벌어지고 난 뒤, 무대는 의상을 갈아입고 나온 리더 준오에게 시선을 돌리며 그렇게 2부가 진행되었다. 시간은 어느덧 한시간 반을 넘어 깊은 밤과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관객들의 자세는 여전히 그들을 향해 있었다. 이어 멤버 전원이 의상을 갈아 입고 나오자 무대 곳곳에서 스모그가 올라오면서 'Tango Toy'가 춤춘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탱고 음악이 리드미컬하게 얽히면서 중간 곳곳에 사이렌 소리와 교차되는 강렬한 느낌의 일렉트로니카였다. 곧바로 'Discoid'의 업템포를 기다렸다는 듯 사람들은 스탠딩 공연을 십분 활용하기 시작했다. 클래지콰이의 느낌과 엇비슷하기도 하나, 키보드는 더 화려하고, 믹싱은 숨을 늦추지 않는다. 코러스도 경쾌하게 분위기는 고조되어 갔다.
캐스커의 이번 앨범을 들으면서 사실 우울한 구석이 더 많다고 느꼈던 것 같다. 곳곳에 물론 사랑 이야기를 담궈내기도 했지만, 멜로디를 따라가다 보면 가파롭게 진행되는 리듬의 곡 조차도 건조한 느낌이 든다. 작사의 고충을 느꼈다는 리더 준오는 앨범 재킷의 우주인을 '우리들'이라는 지칭과 함께 세피아톤 도시에 남겨진 우주인의 소외가 오늘을 살고 있는 너와 나나 다를바 없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 가운데서도 사랑 노래라는 'Last Smile'은 강약이 두드러지는 비트의 강렬함에도 불구하고 음울한 멜로디를 들려주는 보컬의 표정 없는 미소가 매력적인 곡이다. 이어지는 곡인 'phantom'이 의미하는 환영은 준오의 경험에서 비롯된다. 그가 여행을 하면서 피카소 전시장에서 매우 이국적인 느낌의 여성을 보고 말을 걸려 다가갔을 때 그녀가 온데간데 없었던, 당시의 오묘하고 희한한 느낌을 음악으로 표현한다. 다소 불편하게 fade in/out 되는 효과음과 물소리는 미지에 대한 환상적인 영상이 떠오른다. 소소한 농담들과 웃음이 오고 간 뒤, 건반의 진욱과 준오만 남은 채 들려주는 Freetempo(시부야케의 라운지, 일렉트로니카 계열 음악을 해왔음. 라틴 하우스의 느낌도 나는 이들과 캐스커는 잘 어울리는 것 같다.)의 'Sky High'는 많은 관객들의 지지를 얻어냈다. 수줍어하는 건반의 모습과 다소 떨리는 목소리가 팬서비스 라고 생각하든 안하든, 어떻게 말해도 그들의 팬에겐 귀여울 수 밖에! (나도 사실 반했습니다. 키득. -_-)
잠시동안 유쾌한 난장(?)을 뒤로하고 들리는 '다시 내게'는 인트로에서 트립합의 리듬 구성을 엿볼 수 있다. 도회지적 감수성을 애잔하게 토닥이는 콩가 연주가 인상적인 트랙이다. '안녕 프란체스카'에 삽입이 되어 주목을 받았던 'fragile days'의 빠른 보사노바 리듬에 보컬 밑으로 어렴풋이 들리는 DJ의 매우 낮은 목소리는 안드레 교주로 분한 '신해철'의 음성이 떠오르기도 하면서 살짝 재밌기도 했다. 1집의 수록곡인 'vague'는 드럼이 없는 엇박으로 진행된다.
1집의 수록곡이기도 하면서, 가수 Hey와의 피쳐링으로 잘 알려진 곡이다. 우울한 댄스곡이라는 소개와 함께 이어지는 'sweet'는 그간 묵묵히 곡들을 받쳐주던 베이스(공연 날, '스웨터'의 베이시스트인 신지영이 세션으로 참여했다.) 연주가 돋보였다. 어느덧 장내는 'party's over'를 알리며 'ela (bajo de la luna)'를 마지막 곡으로 택했다. 마치 잼(JAM)을 하는 듯한 모든 세션의 움직임은 그 어느때보다 흥겹고 박진감 넘쳤으며, 아쉬움이 아닌 즐거움을 안고 가는 피날레를 장식했다. 이후 청중들은 집으로 향하는 길도 잊어 버릴 만큼 '앙코르'를 외쳤으며, 캐스커는 앙코르로 무려 세 곡(1103, 선인장, Discoid)을 연신 펼친 뒤 다음을 기약하며 퇴장했다.
사실 일렉트로니카에서 더 이상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없었다. 스타일리쉬한 아이콘들로 묶여진 하나의 패키지처럼 지긋지긋해 질 무렵 오늘 재발견한 새로움은 캐스커였다. 아마 그들은 또 다른 음악을 찾아 이미 소행성을 떠났을 지 모른다. 캐스커의 팬으로써 바라건대, 다음 행성에서는 이 멋진 뮤지션들을모르는 우주인은 없기를. 그리하여 너도 나도 같은 하늘 아래, 그들의 음악과 함께 다시 올 여름을 함께하길.
-안현선(joeygottheblues@yahoo.com)
*공연 관람을 허락하여 주신 루핀 레코드 황성은씨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band]
vocals, shaker - 융진
keyboards, accordian - 진욱
dj, computers, synth, guitar - 준오
acoustic, electric guitar - 박호연
bass - 신지현
drums, latin percussions - 김정석
visual - vj i spy
[set list]
선인장 (from skylab 2005)
midnight moments (from skylab 2005)
7월의 이파네마소녀 (from skylab 2005)
고양이와 나 (from skylab 2005)
corcovado (casker d&b mix) - antonio carlos jobim
tango - ryuichi sakamoto
진욱solo - 쉘부르의 우산
어느날 pt1 (from skylab 2005)
어느날 pt2 (from skylab 2005)
skip (from 철갑혹성 2003)
stem - shiina ringo
guest - UMC
tango toy (from skylab 2005)
discoid (from skylab 2005)
last smile (from skylab 2005)
phantom (from skylab 2005)
sky high - free tempo (미안-_-)
다시내게 (from skylab 2005)
vague (from 철갑혹성 2003)
fragile days (from skylab 2005)
sweet (from skylab 2005)
ela (bajo de la luna) (from skylab 2005)
encore
1103 - livelab mix (from 철갑혹성 2003)
encore2
선인장 (from skylab 2005)
discoid (from skylab 2005)
기획 - lupin records, party the dive
협찬 - bar n dining, midi & s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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