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준경
하나, 둘, 셋 하지 말고 가슴으로 찍어라
홍대 근처 어느 카페에서 만나기로 한 저녁 여덟 시의 시간에 정확히 맞춰 온 그녀는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단정한 뱅 앞머리를 하였다. 메뉴를 건너뛰어 거침없이 카푸치노를 주문하는 것부터 시원시원함이 느껴진다. 오랜만에 만나 반가움을 표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인터뷰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조심스럽게 제스쳐를 취한다.
“간혹 사진 전공했느냐고 물어보시는데 그럴 때마다 창피해요. 잘 찍는 것도 아니고… 그냥 감으로 찍는걸요.”
카메라를 잡은 지 1년 정도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그녀는 트랜스픽션, 바닐라 유니티, 더스티 블루, 펄스데이 등 국내 인디 록 팬들이라면 엄지 손가락을 치켜들만한 밴드들에게 사진을 찍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하루에만 투데이 수 100 이상은 거뜬히 넘기는 그녀의 미니홈피(http://cyworld.nate.com/courlyflower/)를 들어가보면 권준경이라는 사람의 존재감은 더욱 확연해진다. ‘스크랩 해가요~’하는 상냥한 유저부터 시작하여 교묘히 사진 출처를 트리밍(포토샵을 이용하여 사진에 명시된 텍스트 등을 없앰) 하고는 자신의 홈피 또는 블로그에 도배하는 불특정 ‘무개념’ 다수까지. 남 좋으라고 시작한 것도 아닌 그저 개인의 취미에 불과했던 이 사진 찍기의 발로는 어떻게 시작 되었을까.
“오버 그라운드 뮤직에는 별 관심이 없었어요. 밴드 음악에서만 느낄 수 있는 현장감이라든가 청중과의 교감이 오버 그라운드에는 없기 때문이죠. 근데 제가 찾는 그런 느낌이 홍대 공연장에는 있거든요. 언젠가 공연장을 자주 찾게 되고, 팬이 되면서 뮤지션들의 모습을 남기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면서부터 사진을 찍기 시작했어요.”
시작은 미약했다. 지금으로는 핸드폰 카메라 화소 정도 될법한 디지털 카메라를 쓰다 어두운 홍대 공연장이 오기를 불러일으켰는지는 몰라도 그녀는 아는 선배를 통해 좋은 카메라를 빌려 쓰기 시작했고, 이윽고 최고의 사진을 찍고 싶다는 욕심에 거금을 들여 디지털 카메라로는 사양이 가장 뛰어나다는 Cannon EOS 모델과 렌즈 등의 장비를 질렀다. 이후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일이 끝나기가 무섭게 홍대 공연장을 찾아가 사진을 찍고 또 찍었다. 어느 누구도 이처럼 홍대 공연장을 많이 다닌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많게는 한 달에 스물 일곱번을 갔다는 그녀임에도 불구하고 아무 밴드나 셔터를 누르진 않는다. 자신의 취향을 잘 알고있다는 것은 이건 ‘권준경 사진’이구나 라는 것을 확실히 각인하게 만드는 그녀만의 장점이기도 하다.
“어쩔 수 없이 찍어야 할 때도 있는데, 그런 경우 애정의 차이가 사진을 통해 드러날 때가 있어요. 제가 좋아하는 밴드가 나왔을 때 그렇지 않은 뮤지션의 그림과는 확연히 차이가 드러나거든요.”
특히 그녀의 셔터는 밴드 바셀린과 같이 폭발할 것 같은 에너지가 넘치는 과격한 음악과 스테이지 매너에서 리트머스 종이처럼 잘 흡수하고 빛을 발한다. 피아가 공연했던 때를 상기하자면 열광의 극치를 보여주는 피아 팬들 덕택에 무대에서 관객과 같이 슬램하며 찍기도 했다. 행여나 카메라 떨어지지 않을까 고민할 법도 한데 “오히려 음악의 리듬에 맞춰서 그 흐름에 기댄 채 몸을 자연스럽게 움직여주면 의외로 멋진 사진이 나오기도 해요.” 라고 응수한다.
“공연을 많이 보다 보니까 어느 시점에서 이런 포즈를 잡겠다는 느낌이 오면 본능적으로 셔터를 눌러요.”
놀라운 것은 사진이라는 분야에 전혀 관심이 없고, 공연이 좋아서 잡기 시작한 카메라가 이제 일년 남짓 하다는 사실이다. “풍경 사진이나 인물 사진엔 매력을 못 느꼈어요. 오로지 공연의 열기와 현장감을 사진으로 찍어내는 것에 끌렸어요.”
그녀의 사진의 키 포인트는 바로 얼굴 위주의 사진을 찍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물사진 찍으러 간 게 아니기 때문에 현장감이 중요하거든요. 가령 악기를 중심으로 찍는다든가 관객의 모습을 찍어서 ‘공연’의 느낌을 살리는 게 중요하지 얼굴 클로즈업은 공연 사진에 있어서 효용성이 없다는 생각을 해요. 팬들이 찍은 사진 보면서 안타까운 점이 있다면 얼굴 위주로 찍는다는 거죠. 그럼 공연사진 찍었다는 느낌이 안 들거든요.”
그런 그녀에게도 항상 사진 찍는 게 어렵다고 느껴지는 것은 재즈 공연이다. 제스쳐가 많지 않기 때문에 록 공연보다 다양한 모습을 담아내기가 어렵다고. “정신 없고 사진을 찍기 위해 항시 대기해야 하는 록 공연과 달리 재즈 공연 촬영의 매력은 필요한 부분만 찍고 나머지 시간에는 편안히 공연을 즐길 수 있다는 거에요.”
자신이 빠져들 수 있는 대상, 그게 사람이든 동물이든 간에 장기적인 애정을 쏟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 일도 사랑도, 음악도 마찬가지다. 좋아서 시작한 일이 의무가 되면 거기서부터 ‘딜레마’라는 지긋지긋한 애정의 과도기가 찾아오게 마련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취미가 능력이고, 능력이 일을 만들어버린 그녀는 단 한 번도 일과 공연장을 오가는 삶이 지겹다고 느껴본 적이 없다.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일부러 시끄러운 공연장을 찾는다는 그녀니까. 한양대학교 영어 강사로 재직하면서 작년에는 광명 음악 밸리의 사진 스태프로, 올해엔 하이 서울 락 페스티벌의 사진 팀장으로 있었다. 맡은 밴드의 사진을 충실히 찍어주기도 했고, 웹진의 사진 컨텐츠를 제공하기도 했다. 숨 돌릴 틈 없이 음악과 함께하다 보면 이런 에피소드도 생긴다.
“직업이 강사다 보니 이런 일들이 있죠. 하루는 월요병이 도져서 온종일 멍한 거에요. 때마침 언니네 이발관 공연도 다녀왔겠다, 수업을 하는데 언니네 이발관 생각만 나는 거에요. 근데 문제를 풀던 중 답이 이발소가 있었는데, 그때 학생들한테 ‘4번의 이게 답이죠. 언니네 이발관.’ 다들 어리둥절해 하고 웃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또 하루는 어떤 학생이 ‘문제 해석 좀 해주세요.’ 하는데 갑자기 훌리건이 생각나는 거에요. 그 때 제가 한창 훌리건에 빠져 있었거든요. 거기 베이시스트 중 혜석 씨라고 있는데 학생 질문 듣고 대뜸 ‘혜석 씨가 뭐요?’라고 대답한 적도 있어요. 하핫.”
“홈피에다 사진을 올리는 이유가 서로 보고 즐기자는 취지거든요. 어차피 사진에 주소를 싣기 때문에 그냥 스크랩해가도 상관없어요. 사진을 쓰신다고 허락을 구하시는 분들한테는 더할 나위 없이 기쁜 마음으로 쓰시라고 해요. 그런데 트리밍을 해서 출처를 없애고 특정한 목적으로 쓴다든가, 간혹 사진에다 그림을 그려넣기도 하는 분들을 볼 때마다 화가 치밀어 오르죠.” 무단도용과 관련해서 크게 마음고생을 하다 보니 그녀는 스스로 저작권 지식을 찾아보기 시작했고, 한국 저작권 협회에 전화까지 해서 정보를 알아냈다. 심지어는 저작권 관련 변호사에게 자문을 구했다고 하니 저작권에 대해서는 도가 텄다. “저작권 문제로 어떤 밴드와 설왕설래 한 적이 있었거든요. 별 것 아닌 일이었지만 그 일을 통해서 저작권에 대한 인식을 확실히 할 수 있었어요. 그 일을 계기로 덕분에 밴드 관계자 분께서 고정으로 밴드 사진을 찍어달라는 요청을 하셨고, 모든 오해가 눈 녹듯이 사라졌죠. 한마디로 제겐 전화위복이 된 셈이에요. ”
“고등학교 때는 연극이 하고 싶어 연극영화과 무대 연출쪽으로 지원하겠다고 해서 집안의 반대가 엄청났었어요. 심각하게 고민하던 중에 연극하시는 분들 중 생각보다 철학과가 상당수임을 알고 나선 철학과를 들어간 다음 복수전공으로 연영과를 택했죠. 중간에 잠깐 유학을 다녀오기도 했고요.” 환율위기 때 유학을 간 터라 집안의 지원도 끊긴 채 최악의 상황을 버텨내야만 한 그녀. 당시 상황으로는 아르바이트 자리도 쉽게 못 구했던 터라 아끼고 또 아끼다 보니 영양실조까지 걸려서 쓰러진 적도 있다고 한다.
“유학 다녀와서 졸업하고 대학로에서 잠깐 일했는데 생각보다 안 맞았어요. 배신자 소리 들어가면서 빠져 나와 회사 생활이라는 걸 시작했죠.” 무역 회사의 해외 영업 파트로 들어가 특유의 적응력으로 활기찬 직장 생활을 해나갔지만, 아침에 일찍 일어나 서류 챙기고, 상사 스트레스 받는 것이 너무 싫어 회사를 나왔다. 무엇보다 자신과 맞지 않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전환점을 찾아야만 했을 때 그녀는 영어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고, 영어 교육으로까지 눈을 돌리게 된다.
“이건 좀 이상하게 들릴 수 있는데요, 제 취미가 영문법 문제 풀기에요. 주변 사람들은 기겁을 하는데, 논리적으로 하나씩 풀어가는 재미가 쏠쏠하거든요. 이런 재미를 알다 보니 자연스럽게 가르치는 일로 연결되더라고요. 의외로 적성에 잘 맞았어요. 뭔가 주도적으로 지식을 전달할 수 있어서 제 자신도 일을 하면서 늘 힘이 났죠.”
물론 지금은 대학 강사라는 직업이 있고, 좋아하는 공연 보면서 사진을 찍으러 다닌다지만, 속내를 모르는 밴드들이나 클럽 주변 사람들은 그녀를 무척 신기하게 생각하곤 했다. “처음엔 ‘대체 뭐 하는 여자냐’ ‘정체가 뭐냐’는 소리 많이 들었어요. 근데 익숙해졌으니까 관심도 가져주시고 잘 대해주시죠.” 이런 그녀에게 더스티 블루는 좋아하는 밴드이면서 부담 없이 편한 친구라고 한다.
재즈 밴드인 트리올로그와의 인연도 눈에 띄는데 이건 의외였다. 트리올로그 이야기가 나오자 눈을 반짝이며 친해진 계기를 말해준다. 재즈 공연 보는 것도 좋아하는 그녀는 하모니카 연주자인 전제덕 씨도 좋아한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공연장 내에서 관객과의 소통이 재미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준 언니네 이발관과 델리 스파이스와의 안면도 두터운 편. 특히 델리 팬들 사이에서 ‘준호 삼촌’이라 불리는 윤준호 씨의 오랜 팬이자 그녀에게 새로운 도전을 안겨준 존재가 바로 준호 삼촌이다. "저는 밴드 자체에 관심이 있지, 멤버를 크게 좋아한 적은 없었어요. 어느날인가 델리의 공연을 보러 갔었는데 윤준호 씨가 베이스를 재미있게 치시는 모습을 보곤 팬이 됨과 동시에 베이스를 배우기 시작했죠.” 그래서 그녀의 일정에는 베이스 연습과 레슨이 꼬박 들어가 있다.
“뮤지션들 중 생각보다 사진 찍는 것에 예민한 사람도 있어요. 어떤 이는 렌즈를 가릴 정도인데, 하물며 클로즈업은 극도로 꺼려해요. 아무리 화장을 해도 클로즈업이 적나라하게 얼굴을 드러내니까요. 플래쉬는 가급적 터뜨리면 안됩니다. 어떤 뮤지션은 플래쉬 빛에 놀라서 가사를 까먹은 적도 있대요. 그건 다른 관객도 놀라게 하거든요. 사진 찍는 욕심 때문에 너무 들이대거나 다른 관객의 시야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공연의 모습을 담아낸다면 좋은 공연 사진이 나올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막차 시간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끊임없이 말했다. 지친 기색 하나 없이 그녀는 최근에 다녀온 썸머소닉 이야기를 했고, 출연 밴드 중 뮤즈에 가장 열광했다. 아찔할 정도로 많은 관객이 모여 사진 찍을 엄두도 못 냈다고. 간혹 인디 밴드들의 씨디도 구입하냐는 질문에 카드를 잘라버릴까 생각할 정도로 수입의 대부분이 씨디 값으로 나간 적이 있었노라 고백하기도 했다. 덕분에 그녀의 집에는 인디 밴드들의 음반만 대략 천 장이 넘어간다. 이런 열정을 가진 사람을 만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나는 내가 갖고 있던 글쓰기의 신념에 구체적인 믿음을 실어주는 사람을 만나게 되어 행운이다. 음악을 좋아했던 어린 시절처럼 씨디 한 장 사는 것에 기뻐하고, 누군가의 공연을 보고 에너지를 채우기. 어렵지만 ‘음악을 이야기하려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1. 인터뷰에 응해주신 권준경(http://cyworld.nate.com/courlyflower/) 씨께 감사 드립니다.
#2. 이 인터뷰는 홍대 근처 ‘카페 언두’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인터뷰 녹음 중 큰 소리가 날까 세심하게 신경 써주신 카페 사장님과 직원 분께 고마움을 표합니다.
권준경 작가가 뽑은 'Best 3' 포토제닉
Best 1. ‘내 귀에 도청장치(Prana)’ 보컬 이혁
그들의 공연에선 뭐니뭐니해도 관객과 뮤지션이 혼연일체가 되어 움직이는 손짓의 물결이 가장 멋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합니다. 관객과 하나가 되어 숨쉬는 뮤지션의 열정을 담고 싶어 높은 곳에 올라가 위태위태하게 찍었던 사진인데 갈구하는 듯한 저 손짓들이 너무나 기억에 남아요.
Best 2. ‘디어 클라우드’ 보컬 장희연
특별히 잘 찍었다기 보다는 이 사진을 보는 순간 ‘아 이것이 바로 희연씨의 느낌!’ 이라는 생각이 확 스쳐 지나가더군요. 정적인 듯 하면서도 열정으로 가득 찬 그녀는 너무 아름답죠.
Best 3. ‘이브’ 기타 하세빈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사진입니다. 연주에 몰두해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있는 듯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던 순간이었죠. 역동적인 느낌을 주는 사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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