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 18일 화요일

Blur [Blur]










인기만으로 따지면 오아시스에 둘째 가지만, 나름의 탄탄한 음악적 영역을 구축하고 있는 영국 최고의 인기 밴드 블러(Blur)의 다섯 번째 스튜디오 정규 앨범이다. 레저 활동의 즐거움(1집 ‘Leisure’)을 만끽했던 미소년 데이먼 알반(Damon Albarn)은 현대의 삶은 쓰레기(2집 ‘Modern Life is Rubbish’)라 투덜대더니 즐거운 인생(3집 ‘Parklife’)이 있음을 확인했고, 더 나아가 위대한 탈출(4집 ‘The Great Excape’)을 꿈꾼다. 그리고 이후 브리티쉬 록에 싫증난 어린 아이가 되어 셀프 타이틀인 [Blur]들고 나타났다. 이 앨범은 블러에게 있어 음악의 전환을 뜻했다. 이후에 낸 [13], [Think Tank] 역시 1집부터 4집까지 이어온 블러 특유의 깔끔하고 정제된 브릿 팝이 아니었다. 매우 전형적인 영국인의 말투와 성격을 지닌 데이먼 알반은 브리티쉬 록이라는 태생을 서서히 지우기 시작했다.
97년 초반에 발매된 [Blur]는 표지에서부터 변화를 예고한다. 마치 해상도 높은 보도사진을 보는 듯한 느낌의 사물 사진도, 빈티지한 질감도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만, 뚜렷하고 과장된 기존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느낌의 커버다. 그리고 우리는 ‘Song 2’를 들으면서 뭔가 변했지만, 어떤 구체적인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저 데이먼 알반이 “When I Feel Heavy Metal’이라 외치면 함께 외치며 몸을 벽에 부딪치고, 바닥에 떨어뜨리는 것이다. 블러 노래를 들으면서 신나게 헤비메틀이라 외쳐본 적이 있었던가? 기억엔 전혀 아니다. 오히려 [Leisure]의 ‘Sing’을 들으면 가도가도 끝이 없는 기찻길을 걷는 루저가 생각나고, [Parklife]의 ‘Girls and Boys’를 들으면 어떤 우스꽝스러운 디스코를 춰야 할지 갈팡질팡했을 뿐이다.
‘Song 2’는 기존의 블러 음악을 완전히 씩 웃어버린 그런지(Grunge)에 대한 헌사다. 90년대가 지나가고 그런지는 서서히 죽어갔지만, 그런지를 듣고 자란 지금 세대의 뮤지션들에겐 여전히 유효한 영향력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블러가 이를 간파한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앨범 [Blur]는 당시 미국 음악에 심취해 있던 데이먼 알반의 취향이 고스란히 담긴 작품이다. 물론 ‘Beetlebum’을 들으면 그래도 브리티쉬라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Chinese Bomb’이나 ‘I’m Just a Killer for Your Love’로 돌리면 블러의 국적이 의심스러울 만큼 미국 인디 록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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