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 시절의 빛나는 그림자
새삼 고등학교 시절이
떠올랐다. 그 당시, 그러니까 80년대 초반에 태어난 나와 같은 친구들의 학창시절에는 두 부류가 있었다. 다이어리를 갖고 있는, 그렇지 않은 아이들. 억지일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다이어리는 빽빽했던 7교시, 8교시 이어지는 보충 수업보다 더 많은 시간을 나와, 그들과
함께했다. 어쩌면 부류를 나눈다는 것도 억지일 수 있겠다. 다이어리가
없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니까.
그렇게 우리시대엔 어떠한
짓거리도 허용될 수 없는 수업시간에 통상적으로, 암묵적으로 다이어리 돌려보기와 다이어리 꾸미기가
소소한 일상이었다. 사실 한 반에 그 많은 54명이
복닥대며 살아가는데 다이어리만큼 서로를 알게 되는 좋은 통로도 없었다. 온갖 먼지와 습기를
머금고 너덜해진 영화 잡지 속 자료 사진을 오리고 제멋대로 붙여 만든 비밀의 공간. 좋아하는
밴드는 스매슁 펌킨스라 적어놓았던 한 페이지가 닳았을 때 즈음 그걸 본 한 녀석은 지금 세상에서 뗄 수 없는 소중한 친구가 되었다.
흔히 어떤 음악의 감성을
두고 ‘아날로그’라는 말을 쓴다. 뮤지션
이름 중에도 있지 않나. 다이어리가 퇴색해질 무렵, 모든
것이 새로워졌지만 새로울 것 없다며 아날로그를 찾는 그마저도 새로울 게 없는 무형의 세계에서 클라우드 쿠쿠랜드의 음악을 듣고 새삼 고등학교 시절이
떠올랐다. 아날로그도 아닌, 디지털도 아닌, 바래진 추억을 꺼내어 읽고 식지 않은 그 때의 감수성과 공존하는 방법을 배운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다. ‘여고괴담 2(영화 역시 소녀의
다이어리를 모티브로 삼고 있다)’에서 보았던 구름 한 점 없는 투명한 하늘 위로 교복 입은 소녀가 올라가
햇빛에 몸을 투영한 채 거니는 눈부신 오후가, 이보다 조금 더 현실적이고 우울한 생채기를 담고
있는 ‘버스, 정류장’의 미온한 현실과
상반된 너무도 조용한 파스텔 톤 정류장. 루시드 폴 만큼만 일찍 나왔어도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으로
손색없지 않았을까 싶다.
다만 단조조운 패턴이
슬슬 졸음을 유발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대체적으로 곡의 느낌들이 비슷비슷한 것도 아쉬운 점이다. 그렇지만 조용하고 단란한 오후의 서풍을 바라보고 감도 낮은 사진을 찍어보는 이 음악에서 잊고 있던
유년 시절의 빛나는 그림자가 드리운다. 다이어리에 넣어 우연이라도 지금의 나의 친구가 볼 수
있길 기다리면서……
안현선
jjorang2@gmail.com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