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 14일 금요일

푸른새벽 [보옴이 오면]





















처음이자 마지막 편지

수험생 되기 카운트다운 한 달 전의 겨울은 무척이나 시렸어. 동공엔 맥박도 흐르지 않을 만큼 건조한 겨울이었어. 이런 나의 팔을 붙잡고 한 친구는 당시 이대 후문 앞에 있던 클럽 을 찾아갔어. 5,000원에 표를 사고 맥주를 벌컥대다 당신들을 만났어.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기타 하나와 마이크에 기대어 노래를 부르고 있던 당신들이 내 눈앞에 있었어. 눈을 감고 음악을 들었어. 핏기 하나 없이 우울한 멜로디와 가사. 눈을 뜨고 사람들을 쳐다봤어. 참 행복해 보이는 얼굴. 그렇지만 누구나 다 행복하진 않겠지. 다만, 당신들의 음악이 울리는 그 작은 공간에서만큼은 모두가 다 그렇게 미소 지을 수 있었어.

슬픈데 슬프지 않다는 건 아이러니한 일이야. 당신들의 음악은 슬프지만 슬프지 않았어. 가슴이 먹먹해져 오지만 입술 한 켠으로 그래도 세상은 살 만하다는 밋밋한 웃음이 나오고, 그 웃음 때문에 가벼워진 날 보며 정말 실컷 웃었어. 그런데 이젠 정말 슬퍼서 웃음이 나오질 않네. 이젠 당신들의 음악을 들을 수 없다니 나는 그 때의 겨울로 돌아가 맥주를 들이키고 턱을 괸 채 눈을 감아. 웃어요, 스마일. 근데 왜 자꾸 눈물이 괴는 걸까.

몇 년 만에 당신들의 앨범을 집었어. <스무살>의 돌아가고 싶은 좁은 방의 창문을 열고 보옴이 오기만을 기다렸는데, 밖은 여전히 겨울이야. 당신들을 만났던 그 추운 겨울처럼 눈 덮인 하얀 벌판과 벌거벗은 나무 한 그루의 풍경 역시 춥지만 따뜻하리라 믿어. 따뜻하다면, 봄이 조금 늦더라도 상관없어. 전부터 겨울이었던 것처럼 추위에도 앙상하지 않고, 입김에 겹겹이 쌓여도 그 목소리만큼은 온건하고, 또렷하게 기억을 돌려놓는 새벽, 그리고 .

나는 끊임없이 추운 바다를 거닐며 당신들의 음악을 들었어. 바람 실린 눈이 불어오고 살을 에는 추위가 지속되었어. 그래도 땅에 살며시 놓은 씨디 플레이어는 쉼 없이 돌아갔어. 두꺼운 외투에 몸을 지탱하고 스르르 잠이 들었어. 떠나간 사랑얘기 따위 믿고 싶진 않았지만 <사랑>, 흔한 이야기쯤으로 여기고선 시퍼래진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어.

그러고 보면 세월은 시간을 잊지만, 시간은 세월을 잊지 못하는 것 같아. 무엇이 더 나쁘고 좋은지는 몰라도 <하루>가 이렇게 흘러가네. 이 세상 저무는 그 날까지 이렇게 음악을 듣고 편안할 수 있다면 좋겠어. 말하지 않아도 <우리의 대화는 섬과 섬 사이의 심해처럼 알 수 없는 짧은 단어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 우린 그렇게 페이드아웃.

다시 일어나 걸어가. <>하고 머릿속이 밝아져 오는 순간 일출이 보여. 눈부시게 아름다운 새벽의 끝자락이야. 난 한 번도 이런 평온한 순간을 맞은 적이 없었어.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 순간들이 더 많았지만, 이젠 안녕. , 주문 같은 저 말을 혀에 감돌게 하고 다시 기차를 타면 봄이 돌아오겠지. 그렇지만 오늘만큼은 <보옴이 오면>이라 말할 수 있는 겨울이 그리워. 지금 나는 겨울을 부르는 당신들이 그립다. 나의 스무 살, 영원히 푸른새벽으로 남아있는 새벽과 소로의 음악을 들으며 그립다. 고마워, 고마워요. 마음속으로 수천 번은 되뇌어도 아깝지 않을 그 말.

안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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