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 14일 금요일

Original Sound Track [The Fabulous Baker Boys]





















시애틀의 잠 못 이뤘던 데이브 그루신, 한국의 어느 관객으로부터 위로받다

지난 12 1, 나는 데이브 그루신과 리 릿나워의 공연을 볼 수 있었다. 공연장의 <스카라>로 통하는 세종대학교 대양홀 근처는 왠지 모르게 한산했다. 토요일 해질 무렵 총학생회관 건물 앞 같은 분위기랄까. 설마 하는 마음보다는 배가 고파서 요 앞 포장마차에서 한 때 비둘기라 오해했던 닭꼬치를 먹고 어적어적 들어가는데 예정된 공연 시작과는 무관하게 나같은 사람들이 떼거지로 모인 복도 앞은 그야말로 <드림시네마>에서 열리는 시사회 10분 전 분위기나 다를 바 없었다. 문득 며칠 전 스페이스>로 데이브 그루신을 봤다는 누님 말이 떠올랐다. "할아버지가 다 됐어. 그 손가락으로 피아노를 칠 수 있을까 싶더라니까. 또 어찌나 예민한지, 공연 하면서도 쉴 새 없이 장비들을 체크하는데 신경쇠약 직전의 노인네 같았어." 10분이 지나서야 착석한 자리에 앉아 나도 모르게 기대했던 것은 데이브 그루신의 연주가 아니었다. 개념 없는, 나 같은 관객에게 주름 떨리도록 호통치는 물 건너 온 할아버지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하는 호기심이었다. 그런데 예상 외로 데이브 그루신은 차분했다. 아직도 원색의 노란 바지를 고집하는 리 릿나워에 비하면 중후한 양반이었고, 적막같이 어둡지만 적막을 깨울 만큼 매력적인 낮은 목소리로 관객에게 말을 했다. 브래드 멜다우 같은 요즘 피아니스트들의 격정은 없었지만, 낡은 손은 매끄럽게 선율을 타고 들어 팬들에게 '그 찬란하고 아름다웠던 8-90년대 GRP 시절의 데이브 그루신'을 회상케 했다.

여전히 그대로인 멜로디, 변하지 않은 손맛 한 켠에서도 그러나 세월의 무상함이 느껴지는 이유는 내가 예민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아카데미 수상자이자 적어도 내겐 세계적인 이 피아니스트는 한국을 조용히 다녀갔다. 팻 매스니가 왔을때도, 포플레이가 왔을 때도 상상할 수 없는 쓸쓸한 발자국이었다. 누님이 말하셨던 '신경쇠약 직전의 할아범'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나의 눈엔, 한 편의 영화가 끝나고 나지막이 올라가는 엔드 크레딧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황혼이 기대어 있었다. 순간은 영원하지 않고 오직 그 사람의 기억 속에만 회오리치듯 살아있다. 그대의 영광은 지나간 시대에게서만 재생될 뿐이었고, 재즈의 ''짜도 모르는 솜털이 벗겨지지 않은 소녀들은 유유히 좌석을 빠져나갔다.

시나리오 작가인 스티븐 클로브스의 1989년도 데뷔작인 <사랑의 행로>는 여러 가지 면에서 데이브 그루신을 곱씹게 하는 영화다. 그의 GRP 레코드에서 이 사운드트랙을 만들었고, 자신이 거의 모든 곡을 연주한 까닭도 있겠지만, 세월의 무상함을 절묘하게 그려낸 음악 영화라는 점에서 그를 보고 단박에 이 영화가 기억났다. 어릴 적부터 함께 피아노를 치며 명성을 쌓아온 프랭크, 잭 베이커 형제의 삶의 단면을 그려낸 이 영화에는 실제 형제인 보와 제프 브리지스가 데이브 그루신으로부터 피아노 교습을 받고 출연했다. 보 브리지스는 낯설지만, 제프 브리지스는 언뜻 보면 기억이 날 만큼 다양한 영화에 출연한 훌륭한 연기파 배우이다. 실제로도 이 두 사람은 유년시절부터 피아노를 쳤기 때문에 기본기가 뛰어났지만 디테일을 살리기 위해 데이브 그루신의 피아노 치는 모습을 녹화하여 손 모양 하나 하나까지 관찰하고 연습한 뒤 촬영에 들어갔다. 극 중 프랭크()와 잭(제프)가 옛 명성을 되찾고자 클럽에서 함께 공연할 여성 보컬리스트를 찾게 되는데, 바로 그 보컬리스트 수지 다이아몬드 역의 미쉘 파이퍼는 그녀를 놀랄 만큼 자유분방하고, 때론 사랑에 여리지만, 무대에서만큼은 빼어난 관능미를 보여주는 가수로 분하여 어느 누구에게도 정착하지 못하고 외로워하는 잭을 사로잡는다.

영화는 시애틀과 LA를 오가며 데이브 그루신이 표현해내는 잭의 공허함, 한 때의 화려함을 놓치고 이류 클럽을 전전하는 베이커 형제의 고단함과 함께 잘 묻어날 수 있는 공간을 담아낸다. 노을이 지며 스르르 명멸해가는 시애틀의 오후와 자욱한 안개 연기 속에 드러나는 작은 재즈 클럽의 간판이 연주를 하는 것인지, <사랑과 행로>만큼 음악과 배경과 조명이 삼위일체가 되었던 영화는 극히 드물었다. 영화의 오프닝 씬은 이 세가지 요소 만으로도 잭 이라는 인물이 어떤지를 효과적으로 표현해냈다. 시애틀 외곽의 어느 허름한 아파트에서 크레인 샷으로 찍은 이 첫 장면은, 창가를 응시하는 카메라가 낯선 여자가 보이는 아파트 안을 들여다본다. 석양이 질 무렵 여자는 침대에서 뒤척이며 잭에게 다시 만날 수 있겠냐고 묻는다. 잭은 별다른 대답을 주지 않은 채 턱시도를 메고 클럽 공연을 위해 밖을 나선다. 시애틀의 도로 안으로 점점 작아져 가는 그의 모습과 함께 데이브 그루신의 'Main Title(Jack's Theme)'이 흐른다. 그와 함께 눈 여겨 볼 신은 미쉘 파이퍼가 나오는 모든 장면이다. 형제가 보컬을 뽑기 위해 오디션을 보는 중 요란하게 등장하는 수지가 자신은 콜걸 출신이라 밝히며 시작하는 는 극도의 짜릿함을 선사한다. 어떤 콜걸도, 저렇게 차분하게 고혹적으로 청자의 마음을 휘두를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미쉘 파이퍼이기에 가능한 연기였다. 안무가 에게 수 차례 지도를 받고 찍었다는 를 부르는 신에서는 그랜드 피아노에 올라가 마음껏 붉은 벨벳 드레스와 빨간 구두 그리고 립스틱의 자태를 뽐낸다.

음악과 움직임은 곧 두 남녀의 불타오르는 한 때의 사랑으로 타고 식는다. 데이브 그루신이 포착해내는 기류가 이런 것이라면, 듀크 엘링턴 트리오와 베니 굿맨 쿼텟, 디 얼리 팔머 트리오는 영화 중간 중간에 잭이 드나드는 소규모 클럽의 공연을 연상케 한다. 어쩌면 이들의 음악은 데이브 그루신의 취향 중 하나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어찌되었든 <사랑과 행로>는 데이브 그루신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작품이다. 정통 재즈가 아니라는 점에서 리 릿나워와 하비 메이슨 같은 세계적인 연주자 친구들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사장된 명반이며, 스티븐 클로브스가 3년 동안 제작자를 찾기 위해 할리우드를 방황하다 만들어 칸 영화제까지 출품되었던 역작이지만, 지금은 비디오 가게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흘러간 영화가 되어버렸다.

공연이 끝나고 앵콜이 이어지자 리 릿나워와 함께 보사노바가 섞인 퓨전 재즈를 연주하는 데이브 그루신의 노련한 연주에 사람들의 박수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일류가 될 수는 없었지만, 피아노 앞에선 외롭고 비루한 삶마저 잊을 수 있었던 베이커 형제. 아무도 없는 클럽 한 가운데에 앉아 쓸쓸히 피아노를 치는 잭. 듣는 이 없었지만 그 누구보다 아름다운 소리를 냈던 잭의 어깨가 오늘따라 들썩인다. 말 없이 아름다운 노년의 어느 날이다.

안현선
jjorang2@gmail.com

* 크레인 샷 - 거대한 기계팔이 달린 크레인이라는 특수 장치에서 찍는 쇼트. 크레인은 촬영 기사, 카메라를 싣고 어느 방향으로든지 움직일 수 있다. (영화의 이해, 루이스 자네티 저)

Did You Know???
#1. 이 영화의 촬영감독은 최근 개봉한 <디파티드>를 찍은 마이클 볼하우스였다. 그는 1935년 독일 태생으로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영화에 무려 15편이나 촬영을 맡았으며 1982년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 마틴 스콜세지,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와 같은 거장들과 주로 작업하였다. 스티븐 클로브스는 연출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마이클 볼하우스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했다. 이 영화는 특별한 기교와 장치 없이도, 세심한 인물묘사와 절묘한 조명 연출로 1990년 오스카 시상식의 <촬영상>부문에 노미네이트 되었다.

#2. 워쇼스키 형제의 영화인 <바운스>로 주연급 배우로 올라선 제니퍼 틸리의 무명 시절이 이 영화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오디션 장면에서 노래를 부르는 참가자 중 한 명으로 나오며, 이후에 전혀 다른 장소에서 한 번 더 나온다. 제니퍼 틸리 특유의 코맹맹이 소리를 좋아한다면 더욱 더 재미있게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3. 데이브 그루신은 이 영화음악으로 오스카에 노미네이트 되었으나 수상은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래미는 그루신에게 영화음악 부문으로 영예를 주었다.

#4. 이 영화는 칸에 초청받기도 하였는데, 한 외신기자가 이 영화를 보지 않고 프리뷰를 쓰다 제목이 라는 것에 착안하여 '빵집 형제들의 애환을 그린 영화'라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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