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와 다름없는 매장의 주말이었다. 오는 손님 안 막고, 가는 손님 안 잡는 평온하기 그지없는 일요일. 나는 판매직에 충실했다. 적당한 인사와 현금 영수증 물어보기, 거스름돈 잘 세어서 주기. 감사 인사 잊지 않기...
그러고 몇 분 뒤엔가 물건을 산 손님이 저돌적으로 걸어왔다. 마치 3D 영상처럼 내 눈 앞에 옥수수 수염차를 놓더니 힐리스(신발에 롤러가 장착된... 설명이 도리어 오버인가?)를 신은 소녀처럼, 바람처럼 사라졌다. 얼굴은 기억이 안나지만, 갈색 머리에 쑥스러워 했던 표정만은 정확히 기억난다.
또 다시 몇 분 후, 작은 명함 종이가 매장 안으로 날라왔다. 그 뒤엔 이런 메모가 적혀 있었다.
'음료수 드시고 일 열심히 하세요 ^^*
010 8001 6602'
..... 정확히 이렇다.
나중에 빈이와 이런 일이 있었다는 얘기를 하면서 나름대로 몇 가지 결론을 냈다. 결국 연락은 안 했지만.
1. 평소 쓰바를 흠모한 그녀는 나를 쓰바라고 생각함.
2. 중학생 소녀인 그녀는 나를 중학생 소년이 주말 알바를 한다고 생각하고 대쉬함.
3. 그녀는 여성을 선호함. (쉽게 말해 레즈비언)
4. 옥수수 수염차를 나눠주는 알바였다. (나중에 전화하면 피부케어 받으러 오라고 할 시츄에이션)
5. 정말 내가 안쓰러 보였거나,
6. 사심없는 격려였거나
4천만이 넘게 사는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사람을 믿는 것도 쉽지 않지만, 의중을 가려내는 것도 사실 쓸데없는 짓인 것 같다.
2008/06/23 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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